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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헤롯왕과 예수 탄생 관련 기사는 역사의 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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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구글 / 헤롯과 동방박사   ◆ (마태복음2장 1~10절)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라, 이는 선지자로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라.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박사들이 왕의 말을 듣고 갈 새, 동방에서 보던 그 별이 문득 앞서 인도하여 가다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 섰는지라 저희가 별을 보고 가장 크게 기뻐하고 기뻐하더라.’   ● 헤롯왕은 기원전4년에 죽었다. 예수는 서기1년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헤롯왕과 예수 탄생 관련 기사는 시기적으로 부적절 하다. 그런데다가 바리새인들이 말썽을 피우면서 도전해 왔기 때문에 헤롯은 말년을 여리고성 별장에서 보냈다. 예루살렘에 회당이 없었던 바리새인들은 시온 산 정상에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그들의 집회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한 헤롯은 시온산 중턱에 하스몬 궁전이 있는데도 산 정상에 궁궐을 다시 짓고, 한 동을 바리새인들에게 주었다. 가까이 두고 감시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헤롯이 노환으로 얼마 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한 바리새인들이 말썽을 피우면서 헤롯은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이 되고 말았다. 더 이상 바리새인들과 함께 지낼 수 없게 된 헤롯은 여리고성 별장에 가서, 외지에

20, 광범위한 정보 데이터베이스 구축에 성공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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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구글 / 가톨릭 굿 뉴스 모바일 검색   ◆ (고린도전서13장 1~13절)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찌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사랑은 언제까지든지 떨어지지 아니하나 예언도 폐하고 방언도 그치고 지식도 폐하리라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 부분적으로 예언하니 온전한 것이 올 때에는 부분적으로 하던 것이 폐하리라 내가 어렸을 때에는 말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우리가 이제는 거울로 보는 것 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이제는 내가 부분적으로 아나 그 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 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 서기 397년 ‘카르타고의 종교회의’에서 성경이 확정 된 다음, 무세이온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치던 ‘히파티아’가, ‘미신을 진리처럼 가르치는 건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가 서기415년 3월, 무참히 살해당했다.   ● 기독교 신학을 천박한 지성이라고 말한 사람이 또 있었다. “기독

19, ‘다니엘이 말한바…’는 해프닝으로 끝난 역사의 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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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구글 / 감람산에서의 설교       ◆ (마태복음24장 15~21절)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지붕 위에 있는 자는, 집 안에 있는 물건을 가지러내려가지 말며 밭에 있는 자는, 겉옷을 가지러 뒤로 돌이키지 말지어다. 그 날에는 아이 밴 자들과 젖 먹이는 자들에게 화가 있으리로다. 너희의 도망하는 일이 겨울에나 안식일에 되지 않도록 기도하라. 이는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 <사도신경>의 근간은 서기150년 그리스도교 최초의 신앙고백으로 알려진 <로마신조>로 인식되고 있다. 그 후, 니케아 종교회의(AD325), 콘스탄티노플 회의(AD381), 에베소 회의(AD431), 칼케돈 회의(AD451)를 거치면서 <사도신경>은 수정 보완되었다.   ● 기독교인들이 <사도신경>을 소리 내어 함께 암송하는 이유로는, 기독교 복음의 본질적인 진리이고, <사도신경> 토대 위에 교회가 세워졌고, 공적인 신앙고백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로마신조> 이전의 원시교회 시절에는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이 지배적이었다는 얘기가 된다. 그리고 예수 사건은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이 유행하던 시절, 종파분자들의 자중지란이 극에 달하면서 사회적 합의(?)에 따라 성사된 일이었다고 봐야 하는 것이다.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을 거론하다가 살해당한 사람이 또 있었다. 알렉산드리아의 무세이온에서 수학과 천문학을 가르치던 히파티아는 미신을 진리처럼 가르치는 건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가, 서기415년 3월 강의를 마치고 집으

18, 헤로디아 때문에 신세 망친 안티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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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구글 / 헤롯왕과 살로메   ◆ (마태복음14장 3~11절) ‘전에 헤롯이 그 동생 빌립의 아내 헤로디아의 일로 요한을 잡아 결박하여 옥에 가두었으니 이는 요한이 헤롯에게 말하되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하였음이라. 헤롯이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이 저를 선지자로 여기므로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마침 헤롯의 생일을 당하여 헤로디아의 딸이 연석 가운데서 춤을 추어 헤롯을 기쁘게 하니, 헤롯이 맹세로 그에게 무엇이든지 달라는 대로 주겠노라 허락하거늘 그가 제 어미의 시킴을 듣고 가로되 침례 요한의 머리를 소반에 담아 여기서 내게 주소서 하니, 왕이 근심하나 자기의 맹세한 것과 함께 앉은 사람들을 인하여 주라 명하고, 사람을 보내어 요한을 옥에서 목 베어 머리를 소반에 담아다가 그 여아에게 주니 그가 제 어미에게 가져 가니라.’   ● 아그립바가 왕 칭호를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 보에뚜스 가문의 사제들만큼이나 심기가 불편한 사람이 헤로디아였다. 로마군 장교로 복무 하던 남편이 죽고, 과부가 된 헤로디아는 티베리우스를 미워하면서 사사건건 말썽을 피우던 아그리피나와 단짝이었다. 헤로디아가 유대로 갈 때, 클레오파트라처럼 여왕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아그리피나가 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었다. 헤로디아가 유대로 가기 얼마 전, 동생 아그립바와 크게 다툰 적이 있었다. 멀쩡한 가정을 파탄 내서 좋을 게 없다는 뜻에서 아그립바가 가지 말라고 했다. 안티바와 나바티아의 아래다 공주는 금실이 좋고, 두 사람 사이에는 장성한 아들 아즈버니우스도 있었다. 그런데도 헤로디아가 살로메를 데리고 유대로 갔다.   ● 서기23년, 안티바(43세)와 헤로디아(38세)가 재혼했다. 이혼을 당하고 슬픔에 잠긴 딸의 모습을 보게 된 나바티아의 아레타스 왕은 화를 내면서, 딸의 지참금으로 주었던 마케루스를

출간 예정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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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예수를 찾아 나섰던 슈바이처는 이상적인 이미지일 뿐 예수에게는 참된 가르침은 없다고 말했다. 불트만도 기독교 관점에서 볼 때 찾아야 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 기독교 관점에서 보면, 그들 말이 맞다. 그 당시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이 유행했다.   자신의 가르침이 시기상조임을 깨닫고. 예수는 비유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비유와 산상수훈을 통해서 예수는, ‘태생적 창조 정신과 자력갱생의 정신력으로 새사람이 될 수 있다.’ 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     인간 세상을 널리 이롭게 하기 위함이었다.

17, 호위무사를 자청한 바리새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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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네이버 / 지식백과 / 부림절   ◆ (사도행전12장 21~23절)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 아그립바의 대관식은 서기41년에 있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서기44년 8월1일, 클라우디우스 황제 생일 축하 행사로 아그립바는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다가 무심코 독이 든 음료수를 받아 마시고 54세에 죽었다. 그런데도 사도행전은 ‘몇 마디 말로’ 전체적 맥락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들어놓았다.   ● 아그립바가 왕 칭호를 받고 유대로 간 다음 해(AD38) 10월 말경, 칼리굴라가 중병에 걸렸다.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제국 전체가 황제의 쾌유를 비는 침통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너나할 것 없이 황제의 안부를 묻는 것이 인사가 되었다. 칼리굴라의 얼굴이 들어 있는 신상 앞에서 쾌유를 비는 제사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얌니아 거주 그리스인들이 황제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을 때, 그곳 유대인들이 소란을 피우면서 방해를 하다가 사상자가 발생했다. 얌니아 사건을 알게 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거주 그리스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보복성 공격을 가했다. 유대인 선박을 비롯하여, 주택과 상가에 불을 지르고 물건을 약탈했다. 그곳 유대인 회당에 유피테르 신상을 세웠다. 그리스 지도자 아피온이 이집트 총독 아빌라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자행한 일이었다(AD39). 필로가 다음 해 3월 대표단을 데리고 로마로 왔다. 그리스인들로부터 입은 피해보상과 회당에 세워진 신상 철거를 탄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아피온이 사람을 보내 자초지종을 알렸다. “유대인들은 황제께

16,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아그립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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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도행전 12장 1~12절)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할 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 사도행전은 신약성경 유일의 역사서이고, 다른 복음서와 가교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갈릴리의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오늘날까지 복음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처럼 내세울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서라고 한다면 헤롯왕의 경우, 사도행전12장의 헤롯왕과 기원전4년에 죽은 헤롯왕과 어떤 관계이며, 어디에 있다가 언제 예루살렘에 왔으며, 어느 황제가 유대를 선린왕국으로 격상시켜주었는지 미리 말했어야 한다.   ● 기원전4년, 헤롯왕이 죽었을 때, 시리아총독 퀴리니우스(구레뇨)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장례를 치르고 유대 영토를 헤롯의 자녀들에게 나누어주었다(BC 4). 그 당시 19세였던 아겔라오에게는 예루살렘과 이두메,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을, 16세였던 안티바에게는 베레아와 갈릴리 지역을, 빌립에게는 드라고닛 주변과 갈릴리 북동쪽 가을라니티스, 바티네아, 아우라니티스를 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