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호위무사를 자청한 바리새인들


                                                    출처 /  네이버 / 지식백과 / 부림절
 
(사도행전12장 21~23절)
‘헤롯이 날을 택하여 왕복을 입고 위에 앉아 백성을 효유한대 백성들이 크게 부르되 이것은 신의 소리요 사람의 소리는 아니라 하거늘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곧 치니 충이 먹어 죽으니라.’
 
아그립바의 대관식은 서기41년에 있었다.
그로부터 3년이 지난 서기44년 8월1일, 클라우디우스 황제 생일 축하 행사로 아그립바는 극장에서 연극을 관람하다가 무심코 독이 든 음료수를 받아 마시고 54세에 죽었다.
그런데도 사도행전은 ‘몇 마디 말로’ 전체적 맥락을 파악할 수 없게 만들어놓았다.
 
아그립바가 왕 칭호를 받고 유대로 간 다음 해(AD38) 10월 말경, 칼리굴라가 중병에 걸렸다.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로마제국 전체가 황제의 쾌유를 비는 침통한 분위기로 바뀌었다. 너나할 것 없이 황제의 안부를 묻는 것이 인사가 되었다.
칼리굴라의 얼굴이 들어 있는 신상 앞에서 쾌유를 비는 제사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얌니아 거주 그리스인들이 황제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을 때, 그곳 유대인들이 소란을 피우면서 방해를 하다가 사상자가 발생했다.
얌니아 사건을 알게 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거주 그리스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보복성 공격을 가했다.
유대인 선박을 비롯하여, 주택과 상가에 불을 지르고 물건을 약탈했다.
그곳 유대인 회당에 유피테르 신상을 세웠다. 그리스 지도자 아피온이 이집트 총독 아빌라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자행한 일이었다(AD39).
필로가 다음 해 3월 대표단을 데리고 로마로 왔다. 그리스인들로부터 입은 피해보상과 회당에 세워진 신상 철거를 탄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아피온이 사람을 보내 자초지종을 알렸다.
“유대인들은 황제께 경의를 표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도시마다 유피테르 신상을 세울 때 그들은 동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사지내는 것을 방해하려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칼리굴라는 자기를 신으로 대접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괘씸하게 여겼다. 그래서 필로를 만나주지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한 필로가 돌아가면서 말했다.
“황제가 우리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야훼를 자기 적으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분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자.”
아무리 심기가 불편하더라도 함부로 내뱉을 말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칼리굴라가 이 말을 전해 듣기라도 한다면 가만있을 사람이 아니었다.
 
필로가 한 말을 전해들은 칼리굴라는 서기40년 5월 말경, 유대총독 헤레니무스 카피토에게, 자발적으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신상을 세우게 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유대인들이 신상을 세우지 않겠다면서 결사 항쟁을 선언했다.
칼리굴라는 유대총독을 소환하고, 다시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똑같은 지시를 내렸다.
“신상을 유대인들 스스로가 예루살렘 성전에 세우도록 명령하시오. 만일 불복하거든 무력을 써서라도 그렇게 하시오.”
페트로니우스는 이 사실을 유대인들에게 통보했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신상을 세울 수 없다면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페트로니우스는 지중해 연안의 티루스(티레) 공방에서 신상을 만들게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아그립비가 페트로니우스를 찾아가서, 자기가 칼리굴라를 설득하면 신상 건립을 취소시킬 수 있다고 말했다.
칼리굴라와 아그립바 사이가 각별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페트로니우스는 기다리기로 했다.
아그립바가 급히 로마에 갔지만 신상 건립 취소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되레 칼리굴라가 주는 비밀문서를 페트로니우스에게 전해주는 한심한 신세가 되고 말았다.
“아무래도 그대는 내 명령보다 유대인들 선물을 더 좋아하는 것 같소. 총독 임무에 충실하기보다는 유대인들 호의를 선택했다면, 나에 대한 도전이요. 나는 명령에 불복종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명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소. 당신 스스로 인생의 결말을 짓기 바라오. 잘 가시오.”
그런 다음, 이집트 총독 플라쿠스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신상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플라쿠스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 회당에 신상을 세운 전력이 있었기 때문에 신상 건립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재앙을 선포한다는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마치 세상 종말이나 되는 것처럼 야단법석을 떨었다.
 
서기41년 1월 24일,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치는 축제가 팔라티움 경기장에서 있었다.
황제 일행이 점심을 먹기 위하여 황궁으로 가는 비좁은 통로에서, 근위대장 카이레나가 칼을 빼들고 칼리굴라의 어깨를 내리쳤다. 그러자 앞에 있던 부관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도 칼리굴라의 가슴에 칼을 꽂았다. 뒤이어 비틀거리는 칼리굴라에게 카이레나가 다시금 칼을 내리쳤다.
칼리굴라를 살해한 근위대장은 곧바로 클라우디우스를 새 황제로 추대하고, 자기를 황제 살해범으로 원로원에 고발하게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떠밀리면서 시키는 대로 했다.
29세 칼리굴라가 살해당하고 클라우디우스(50세)가 제위에 올랐다.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는 예루살렘으로 전령을 급히 보내, 플라쿠스 총독에게 신상 건립을 취소하고 이집트로 돌아가라고 했다.
신상이 세워지기 직전이었던 2월10일, 플라쿠스 총독은 이집트로 돌아갔다.
예루살렘 성전에 세워질 뻔 했던 유피테르 신상은 유대인들 손에 박살이 나면서 사건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며칠 후,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립바를 정식 왕으로 책봉한다는 공문을 보내 유대를 총독 체제에서 선린 왕국으로 격상시켰다.
 
 
  아그립바는 클라우디우스 황제로부터 신상 건립 취소 연락을 서기41년 2월 중순의 부림절에 받았다.
그 날은 심술궂게도,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에게 한꺼번에 죽임을 당할 뻔했다가 위기를 모면한 날이었다. 그 때의 참담했던 지난 일들을 기억하려고 가면무도회와 시가행진을 하던 날이었다.
유피테르 신상 건립 취소로 말미암아 자신의 권위가 확고해졌다고 판단한 아그립바는 유월절 예비일 전날인 3월 13일에 대관식을 한다고 발표했다.
그러자 사제들은 납득할 수 없는 조건을 달았다.
대관식을 하던 날, 여인의 뜰에 마련한 무대 주변에는 하얀 옷을 입은 사제들과 검정 외투를 걸친 바리새인들이 늘어서 있었다.
유월절 행사 기간 중이라서, 많은 순례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아그립바는 헤롯왕이 입었던 찬란한 의상과 왕관을 쓰고 무대 중앙에 섰다.
대제사장이 자신의 머리에 성수를 뿌리는 의식을 해야, 정식으로 왕이 될 수 있다는 사제들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있었다.
금패가 달린 성관을 쓰고, 청색 자색 홍색 실로 화려하게 수놓은 예복을 입은 대제사장 칸테라스가 성전 본당 건물에서 나왔다.
그의 가슴에는 번쩍이는 흉패가 달려 있었다. 아그립바가 입은 의상보다 더 화려했다.
손에는 두루마리가 들려 있었다. 무대에 오른 대제사장이 두루마리를 펼치면서 아그립바에게 읽으라고 했다. 히브리어로 된 신명기였다.
아그립바가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다.
“네가 야훼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주위의 열국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 반드시 야훼께서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며,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 ”
바로 이때였다. 무대 옆에 서 있던 보에뚜스 가문의 늙은 사제 시몬이 무리를 향해서 큰 소리로 말했다.
“방금, 저 사람이 한 말을 들으셨지요?”
그는 무대 위에 서 있는 아그립바를 가리키면서 다시 말했다.
“이방인은 성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는, 참으로 고귀한 율법을 저 사람이 자기 입으로 말했습니다. 오직 이스라엘 백성만이 성전에 발을 들여놓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두메 출신 헤롯의 손자입니다. 저 사람은 유대 왕이 될 수 없는 이방인입니다.”
반역이었다.
유대를 선린 왕국으로 격상시킨 클라우디우스 황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사제들이 이런 식으로 나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에 아그립바는 당황한 나머지, 어찌할 바를 몰라 쩔쩔매고 있었다.
사람들이 ‘우~ 우~’ 하면서 야유를 보냈다.
그러자 누군가가 갑자기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회당의 최고 지도자 가말리엘이었다. 그는 대제사장을 밀쳐내고, 어쩔 줄 몰라 하는 아그립바의 손을 힘차게 붙잡고 말했다.
“걱정하지 마시오. 아그립바! 당신은 우리의 형제요. 아무렴! 우리의 형제이지.”
그는 무리를 향해서 큰소리로 말했다.
“우리의 형제, 아그립바 왕 만세!”
그러는 사이에, 검정 외투를 걸친 바리새파 랍비들이 무대를 에워쌌다.
또 다시 가말리엘 입에서 ‘우리의 형제, 아그립바 왕 만세!’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러자 회당의 바리새인들이 합창했다.
“유대 왕, 아그립바 만세!”
대제사장 칸테라스가 도망치듯 무대에서 내려왔다.
다른 사제들도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다.
아그립바는 바리새인들의 호위를 받으면서 황급히 여인의 뜰을 빠져 나갔다.
그 후, 아그립바는 호위무사를 자처하는 바리새인들의 눈치를 보면서 3년여 꼭두각시 왕 노릇을 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그런데도 사도행전은, ‘헤롯이 영광을 하나님께로 돌리지 아니 하는 고로, 주의 사자가 치니 충이 먹어 죽었다.’고 되어 있다.
이것이야말로 거짓말로 꾸며진 역사 왜곡의 사례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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