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예수 사건>을 지휘 감독했던 바리새인들


                                           
                                                     구글 / 오순절 성렬강림 / 엘 그레코
 

(사도행전2장1~13절)
‘오순절 날이 이미 이르매 저희가 다 같이 한 곳에 모였더니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저희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불의 혀 같이 갈라지는 것이 저희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 임하여 있더니, 저희가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방언으로 말하기를 시작 하니라.
그 때에 경건한 유대인이 천하 각국으로부터 와서 예루살렘에 우거하더니 이 소리가 나매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의 말하는 것을 듣고 소동하여 다 놀라 기이히 여겨 이르되 보라 이 말하는 사람이 다 갈릴리 사람이 아니냐?
우리가 우리 각 사람의 난 곳 방언으로 듣게 되는 것이 어찌된 일이요?
우리는 바대인과 메대인과 엘람인과 또 메소보다미아, 유대와 가바도기아, 본도와 아시아, 브루기아와 밤빌리아, 애굽과 및 구레네에서 가까운 리비야 여러 지방에 사는 사람들과 로마로부터 온 나그네 곧 유대인과 유대교에 들어온 사람들과 그레데인과 아라비아인들이라, 우리가 다 우리의 각 방언으로 하나님의 큰일을 말함을 듣는 도다 하고,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고린도전서는 서기55~56년 무렵에 나왔다. 그로부터 6~7년이 지났을 무렵인 서기62~63년에 사도행전이 나왔다.
고린도전서는 <최후의 만찬>과 같은 선정적이면서 자극적인 내용이 들어 있어서 기독교의 시작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다.
사도행전에는 <오순절 성령강림>과 같은 놀랍고, 신비롭고, 황당하기까지 한 내용이 들어있기 때문에 대중을 선동하기 위한 개막 퍼레이드였다고 볼 수 있다.
사도행전에는 극적인 장면이 많다. 무척 흥미로운 책이다. 1~12장은 베드로에 관한 이야기이고, 13~28장은 바울의 이야기이다.
두 사람 모두 기독교 창시의 중추적 역할을 했다. 그런데 사도행전에는 절대적 우위를 확보한 이가 또 있다.
‘삼위의 하나님 성령’ 이시다. 그래서 사도행전을 <성령님의 행전> 또는 <순교행전>이라고도 말한다.
 
바울이 기독교를 창시하기 전부터 유대에는 ‘부활한 메시아’의 미신적 신앙이 성행하고 있었다.
그와 같은 사실을 원로사제 안나스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예수에게 죄가 없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모임이었던 다락방에 갔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 예수를 죽이려고 했다. 경각심을 높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대제사장 가야바는 예수에게 죄를 덮어씌울 수 없다면서 고집을 부리다가 예수는 총독(빌라도) 법정으로 가게 되었다.
바리새인들도 ‘부활한 메시아’의 미신적 신앙이 성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동굴무덤에 넣어, 은밀한 미스터리와 허망지설 중심에 들게 했다. 이때부터 <예수 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사도행전 저자는 맥추절을 오순절이라고 명칭을 바꾸고, 예수가 사망한 이후 다시 제자들이 두 번째 다락방에 모여, <오순절 성령강림>과 같은 놀랍고 황당하기까지 한 사건이 있었다고 썼다.
그런데 <예수 사건>의 단초를 제공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에 대하여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사람이 죽으면 빨리 흙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갈대로 엮은 들것 위에 시신을 놓고 땅에 묻는 전통 장례법이 있는데도 예수의 시신을 동굴무덤에 넣고 그들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는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데도 사도행전을 비롯하여 네 복음서는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까 ‘영원히 풀리지 않을 숙제’라면서 억설과 궤변이 난무하고 기독교는 각자 이설로 제자백가 시대를 연출하게 되었다.
 
  

고린도전서는 바울이 썼다. 사도행전은 바울과 절친한 사이었던 신원미상의 그 누군가가 썼거나, 유대교의 관습을 따르는 어떤 개종자가 썼다는 설도 있다.
신원미상의 저자가 서기30년 오순절 행사에 참석했다가 현장을 목격하고 썼다고 보기에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문제점이 많다.
유대인들의 3대 절기는 유월절, 맥추절(칠칠절), 초막절이다.
맥추절은 무교절 이후 칠일을 일곱 번 지난 절기라서 칠칠절이라고도 부른다.
유대력의 신년 정초는 유월절(과월절)이고 율리우스력의 3월 중순이다.
맥추절은 5~6월(시반), 속죄일과 초막절은 9~10월(티쉬리), 수전절은 11~12월(키슬레브), 일 년의 마지막 절기 부림절은 2~3월(아달)에 있다.
초막절은 여름철 가뭄이 끝나갈 무렵이라서 기우제를 겸한다. 부림절은 70여 년 동안 바벨론에서 살다가 1차 귀환(BC537) 후, 2차 귀환(BC458)이 있기 직전, 유대인들이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에게 한꺼번에 죽임을 당할 뻔 했었다. 그 때의 참담했던 일들을 기억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절기였다.
수전절은 시리아왕 안티오쿠스 4세에 의하여 유대교 행사가 금지되고(BC165), 그리스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올림피안 제우스’로 도시 이름을 바꾸고 23년 동안 제우스 신을 섬기다가 독립을 쟁취한 날을 기념하는 축제였다.
 
이처럼 유대인들은 약소민족의 설음 속에서 살았다. 강대국 지배에서 자력으로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비전이 제각각이었다.
모세의 5경에 포함된 ‘신명기’에서 비롯된 계약사상과 선지자가 쓴 ‘이사야서’가 암시하는 대속사상은 상충되는 내용이라서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신명기’의 계약사상은 유대 민족이 애급을 비롯하여 바벨론과 시리아에 의하여 핍박을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인정했다.
핍박은 어디까지나 연단의 과정이기 때문에 이제 곧 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예루살렘에서 축복 받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긍정적 사상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사야서’는 정반대의 주장을 폈다.
누군가가 대속으로 죽지 않으면 고난의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마치 사람들에게 얼굴을 가리 우고 보지 않음을 받는 자 같아서 멸시를 당하였고,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것은 그리스의 ‘디오니소스’, 로마인들의 ‘바쿠스’를 연상시키는 내용이었다.
신명기는 사두개파의 사제들이 좋아했고, 이사야서는 광야의 수도원 에세네파 사람들이 열성적 태도를 보였다.
이사야서의 대속사상은 신명기의 계약 사상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형극이었다.
사두개파와 엣세네파 틈새에서 바리새인들은 해석을 유보한 채 연구 대상으로 여기고 있던 시기에 <예수사건>이 발생했다.
바리새인들은 이처럼 좋은 기회를 놓칠 리 만무했다.
   
그래서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동굴무덤에 넣었다.
그래놓고서는 ‘부활한 그리스도’를 믿지 못하고 갈릴리로 돌아가서 생업에 종사하고 있는 제자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게 했다.
그 후, 베다니 사람들과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바리새인들의 암묵적 단합과 중재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에, <오순절 성령강림>과 같은 연극이 자꾸만 연출되고 있다.
참으로 개탄스럽고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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