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우여곡절 끝에 왕이 된 아그립바




(사도행전 12장 1~12절)
‘그 때에 헤롯왕이 손을 들어 교회 중 몇 사람을 해하려 하여 요한의 형제 야고보를 칼로 죽이니 유대인들이 이 일을 기뻐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으려할 새 때는 무교절일이라 잡으매 옥에 가두어 군사 넷씩인 네 패에게 맡겨 지키고 유월절 후에 백성 앞에 끌어내고자 하더라.
이에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헤롯이 잡아내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여 누워 자는데 파수꾼들이 문 밖에서 옥을 지키더니 홀연히 주의 사자가 곁에 서매 옥중에 광채가 조요하며 또 베드로의 옆구리를 쳐 깨워 가로되 급히 일어나라 하니 쇠사슬이 그 손에서 벗어지더라. …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나서 가로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모여 기도하더라.’
 
사도행전은 신약성경 유일의 역사서이고, 다른 복음서와 가교 역할을 할뿐만 아니라 갈릴리의 나사렛 예수가 어떻게 예루살렘을 거쳐 로마에까지 이르게 되었는지, 그리고 어떻게 오늘날까지 복음의 역사가 지속되고 있는지를 보여 준다.
이처럼 내세울만한 가치가 있는 역사서라고 한다면 헤롯왕의 경우, 사도행전12장의 헤롯왕과 기원전4년에 죽은 헤롯왕과 어떤 관계이며, 어디에 있다가 언제 예루살렘에 왔으며, 어느 황제가 유대를 선린왕국으로 격상시켜주었는지 미리 말했어야 한다.
 
기원전4년, 헤롯왕이 죽었을 때, 시리아총독 퀴리니우스(구레뇨)가 예루살렘으로 가서 장례를 치르고 유대 영토를 헤롯의 자녀들에게 나누어주었다(BC 4).
그 당시 19세였던 아겔라오에게는 예루살렘과 이두메,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을, 16세였던 안티바에게는 베레아와 갈릴리 지역을, 빌립에게는 드라고닛 주변과 갈릴리 북동쪽 가을라니티스, 바티네아, 아우라니티스를 주었다.
이때 유산 상속을 받지 못한 헤롯의 세 번째 며느리 베레니케가 딸 헤로디아(11세)와 여섯 살 난 아들을 데리고 로마로 갔다.
 
클라우디우스가 여섯 살이 되던 해(BC 4), 서른 살 가량 되어 보이던 유대 여자 베레니케가 헤로디아와 아들을 데리고 클라우디우스 모친 안토니아를 찾아왔다. 남편이 시리아 주둔 군단 사령관 바루스 휘하의 장교로 복무한 적이 있었고, 바루스의 소개로 왔다.
어린 남매를 데리고 온 베레니케는 예루살렘에 있었으면 호강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고생을 사서 했다.
가사를 돌보는 일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허드렛일은 노예들이 했다. 그러나 유학 온 고만고만한 또래 아이들 뒷바라지를 해야 하고, 신경 쓰이는 게 많았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늘 지쳐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안토니아가 칭찬을 했다.
“망측한 종교적 관습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베레니케는 정직한 내 친구랍니다. 최고의 살림꾼이죠.”
‘망측한 종교적 관습’이라는 말은 유대인 누구에게나 따라붙는 수식어였다. 특히 베레니케는 유대인임을 고집스럽게 내세웠다. 아들이 장성하면 유대 왕이 된다는 기대를 하고 있었다. 그래서 더욱 유난을 떨었다.
 
그녀는 아들을 ‘헤롯 아그립바’라고 불렀다. 극동 지역 사령관이었던 마르쿠스 아그립바가 예루살렘 성전 본당 준공식에 참석하여, 청동 포도주 잔과 황소 100마리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BC15). 행사에 참석한 이들이 고기를 배불리 먹었으므로 사령관 이름을 빌리면 유대인들의 환심을 사리라는 생각에서였다.


서기18년, 아르메니아 왕 아르탁시아스가 죽고, 후계자 문제가 불거졌을 때 티베리우스는 사령관 비텔리우스에게, 아르탁시아스 아들 티리다테스를 데리고 가서 왕권을 계승하라고 지시했다. 
비텔리우스는 파르티아 왕을 만나러 가면서, 현지 사정에 밝은 로마 병사들로 하여금 사복을 입고, 백성이 자발적으로 티리다테스를 새 왕으로 추대하는 모양새를 갖추어야 한다고 신신당부했다.
아르메니아 왕위 계승 문제는 로마와 파르티아 간의 외교 분쟁으로 비화될 수 있었다. 그래서 은밀한 가운데 용의주도한 작전이었다.
작전을 지휘한 사람은 로마군 기병대장이였던 사마리아인 실라와 유대인 알렉산더였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말썽 없이 티리다테스가 아르메니아의 새 왕으로 등극했다.
무공훈장과 로마시민권을 받은 실라는 군에서 전역하고, 사마리아로 갔다.
나일 강 삼각주에 있는 로마 황실농장 관리인의 아들이었던 알렉산더는 계속 군복무를 수행 중에 있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아그립바가 자기도 유대 왕 칭호를 받게 해달라면서 귀찮게 굴었다.
아그립바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던 클라우디우스는 숙부 티베리우스를 찾아가서, 아그립바에게도 유대 왕 칭호를 주면 어떻겠는가? 넌지시 물었다.
“유대는 안 돼!”
단호한 어조로 티베리우스가 말했다. 아르메니아는 왕정 체제가 가능하지만, 종파분자들의 자중지란이 끊이지 않는 유대는 왕정이 가당치도 않다는 뜻에서 한 말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후, 티베리우스를 실망시키고 관직도 빼앗긴 칼리굴라가 집에 왔을 때, 아그립바가 실없는 소리를 했다.
“티베리우스 시대가 빨리 끝나고 자네가 황제 지위에 오르기를 기도하고 있네. 무엇으로 보나 자네가 후계자야.”
유대 왕이 되지 못해서 안달이 났던 아그립바는 티베리우스의 손자 게멜루스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이었다.
그러자 칼리굴라가 싱글벙글거리며 말했다.
“내가 황제가 되면 유대 왕으로 보내주겠습니다.”
두 사람 얘기를 유티쿠스가 듣고 있었다. 그 자는 해방노예라서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러고 나서 며칠이 지난 다음, 유티쿠스가 아그립바의 옷을 훔치다가 발각되었다.
아그립바는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심하게 꾸짖었다.
망신을 당한 유티쿠스가 앙심을 품고, 나폴리 만의 티베리우스에게 달려가서 아그립바가 역적모의를 했다고 고자질했다.
졸지에 반역자가 된 아그립바가 불려갈 때, 클라우디우스도 따라갔었다.
티베리우스가 유티쿠스에게 물었다.
“고소할 것이 있다고 했는데, 말해보라!”
유티쿠스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말했다.
“늙은이가 죽고, 자네가 황제가 되는 날이 빨리 왔으면 좋겠네. 게멜루스가 방해가 될 것 같으니 내가 해치우겠네.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아그립바는 결백을 증명할 요량으로 말했다.
“제가 고인이 되신 아드님, 카스토르와 함께 교육을 받으면서 형제처럼 지낸 날들을 기억해 주십시오. 저는 게멜루스를 가르치기까지 하지 않았습니까? 유티쿠스는 도적의 주제에 뉘우칠 생각은 하지 않고 거짓을 고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애원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그립바는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AD 36).
 
아그립바가 감옥에 들어가고, 6개월이 되던 3월15일(AD 37), 카이사르의 추모 행사가 폼페이 경기장에서 있었다.
행사에 참석한 티베리우스는, 병사들이 보는 앞에서 시범적으로 창을 던지다가 어깨를 다치고 혼수상태에 있다가 다음 날 숨을 거두었다.
폼페이로 달려 온 칼리굴라는 감옥에 있던 아그립바를 데리고 나왔다.
아직 제위에 오르지 않았지만 아그립바와의 약속을 지키겠다는 의사 표시를 했다.
때 마침 귀국한 유대 총독 필라투스(빌라도)가 황제가 된 칼리굴라에게 말했다.
“왕이 돼서 예루살렘에 가면, 생명이 위태로울 수 있습니다.”
 
필라투스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칼리굴라가 헤레니무스 카피토(AD37~41)를 유대 총독으로 보내고, 아그립바에게는 유대 왕 칭호를 주고, 빌립이 죽고(AD34) 공석 중인 유대 북부 지역으로 가라고 했다.
아그립바는 불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클라우디우스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왕 칭호를 받은 것으로 만족하게. 예루살렘보다야 빌립의 땅으로 가서 있는 게 자네 신상에 좋을 것이야.”
파멸적이고 고집스러운 유대인들의 상호 적대행위를 멈추지 않기 때문에 해 본 소리였다. 얼마 후, 아그립바은 부인 키프로스와 아들(10세), 장녀(8세), 차녀(3세), 그리고 해방노예 블라스투스(블라스도)와 함께 유대로 갔다(AD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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