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 가톨릭 타파가 최종 목표였던 계몽주의

                                           출처 / 구글 / 17세기 베르사유 궁전 

루브르 박물관을 둘러본 다음,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었습니다.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파리 시내에서 남서쪽으로 20km 가량 떨어진 베르사유 궁전으로 갔습니다.
번쩍거리는 금박으로 장식된 프랑스 왕가 문장이 붙어있는 정문 앞에서 가이드가 말했습니다.

“이곳은 왕족이나 귀족이 승마를 즐기던 평원이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절대 권력을 행사하던 루이14세를 돋보이게 할 목적으로 건립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정원과 숲까지 포함하면, 우리나라 여의도(2.9㎢) 크기와 비슷합니다. 궁전과 정원 전체를 둘러보는데 5~6시간 정도 소요됩니다. 궁전 내부로 들어가면 다양한 볼거리가 있습니다. 아폴론의 방, 비너스의 방, 다이애나의 방, 머큐리의 방, 마르스의 방, 루이14세의 방, 전쟁의 방, 평화의 방을 비롯하여 역사적 사건을 주제별로 파악할 수 있도록 꾸며져 있습니다. 방 중에서도 아폴론의 방이 가장 호화스럽습니다. 루이14세가 은으로 만든 왕좌에 앉아 업무를 보면서 위용을 과시했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흥미로운 방은 거울의 방입니다. 길이75m, 높이12m의 넓은 방 벽면을 17개로 나누고, 크고 작은 578개의 거울로 장식했습니다. 거울의 방에서는 수시로 축제가 열리고 외국 사신들을 접견했다고 합니다. … ”

나는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엉뚱하게도 <바티칸시국>을 떠올리고 있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은 절대 왕권의 대표적 상징물입니다.
<바티칸시국>은 로마 교황을 중심으로 절대자 하느님을 믿는 가톨릭의 구심점입니다.
가톨릭과 왕정은 밀원관계였습니다. 가톨릭과 왕권의 유착관계는 공공연한 비밀이었습니다. 실생활에 있어서, 가톨릭이 절대적 우위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
중세 유럽의 산업과 시장 경제를 가톨릭이 독점했습니다. 화폐의 가치와 상품의 가격 책정과 노동 임금을 결정할 때 가톨릭이 좌지우지 했습니다.
가톨릭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에 대해서도 간섭했습니다. 윤리의 내용을 정하고, 자연의 본성을 설명하고, 이웃에 대한 의무를 규정하고, 선과 악을 이분하는 등 행동 지침을 규범화 하면서 통제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왕정과 마찬가지로 가톨릭을 향해서도 폭정과 사회적 병폐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다. 그리고 가톨릭은 또 다른 엄중한 과오도 범했습니다.
르네상스의 근본 취지는 물질문명과 정신문화의 동반 성장이었습니다.
르네상스는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운동이었습니다. 도시의 발달과 상업자본의 형성을 배경으로 - 인간의 개성, 합리성, 현세적 욕구를 추구하는 정신에도 문명인에 어울리는 변화가 따라주어야 합니다.
모든 사람은 지적 정보를 처리할 수 있는 비상한 두뇌를 가지고 있습니다. 태생적 창조 정신을 가진 존재이며, 문명의 씨앗입니다. 그래서 르네상스 이후 문학, 미술, 건축, 자연과학 등 여러 방면에 걸쳐서 물질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했습니다.
그런데 가톨릭이 정신문화의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르네상스는 기형적으로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온갖 부조리와 악덕이 활개 치면서 문명인과 야만인이 함께 생활하는 이상한 문명사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물질문명과 정신문화가 동반 성장하지 못하면서 정신과 마음이 둘로 나뉘게 되고, 인류는 엄청난 사회 문제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문제점을 예단한 사람들이 이신론과 계몽주의 사상가들이었습니다.

이신론은 진리의 근거를 인간 이성이 인식할 수 있는 자연적인 것에서 구하려는 시대사조였습니다.
가톨릭의 신을 창조주로 인정하지만, 세상일에 관여하거나 계시 또는 기적으로, 자기를 나타내는 인격적 주재로서의 신을 부정하는 합리적인 종교관이었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가톨릭교회의 권위에 바탕을 둔, 구시대의 권위와 특권과 제도에 반대하였습니다. 인간적이고 합리적인 사유를 제창하고, 이성의 계몽을 통해서 인간생활의 진보와 개선을 주창하였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이성의 힘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믿었습니다. 잘못된 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목적을 가지고 자발적으로 행동한 사람들입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인간주의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자유기고가들이고, 저널리스트였습니다. 사회악을 비판하고 개혁을 주장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 디드로(1713~1784)는『백과전서』를 편집 발행했습니다. 가톨릭을 비난하는 여러 권의 책도 썼습니다. 유물론을 주장하고, 종교를 파괴하고, 자유정신을 고취하기 위하여 싸웠습니다.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였던 몽테스키외, 볼테르, 루소, 디드로, 엘베시우스와 같은 사람들은 유럽의 정치적 대사건이 발생하기 이전에 사망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남긴 불씨가 되살아나면서 문화 혁명으로 활활 타오를 수 있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1789년 7월14일, 절대 왕조를 무너뜨린 대혁명이 일어났습니다. 대혁명이 일어날 당시, 프랑스 국토의 90% 이상이 왕과 귀족들의 소유였습니다. 왕과 귀족은 시민과 농민들을 착취하면서 사치만을 일삼았습니다.
이에 불만을 품은 프랑스 시민이 자유, 평등, 박애를 부르짖으며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혁명을 일으키고,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처형하고, 부르봉 왕조를 무너뜨리고 공화국을 세웠습니다.
프랑스 대혁명은 세계 모든 나라에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자유화의 불길은 걷잡을 수 없이 번져나가면서 민주주의의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처럼 격변하는 정세 속에서도,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표적으로 삼았던 가톨릭은 아무런 공격도 받지 않았습니다. 어느 지역에서도 가톨릭을 타파하려는 움직임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여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급변하는 시대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가톨릭은 콜럼버스(1451~1506)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 때 그쪽에 관심을 보이면서 성직자들을 파견했습니다.
성직자들은 위험을 무릅쓰고 오지까지 들어가서 원주민들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원주민들이 다른 문화와 다른 종교를 용인하지 않으려고 저항하니까, 총칼로 위협하면서 원주민을 죽이거나 강제로 개종시켰습니다.
가톨릭 단체였던 <예수회>, <도미니크 수도회>,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성직자들은 스페인이나 포르투갈의 영토 확장에 협력하면서 자신들의 영역도 넓혀나갔습니다.
아시아에도 눈독을 들였습니다. 인도의 서부 연안 ‘고아’를 근거지로,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선교 사업을 벌여서 새로운 영역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처럼 가톨릭은 지능적 생존 전략을 구사하면서 돌파구를 마련했습니다. 고무풍선은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부풀어 오르면서 본질은 변하지 않습니다.
가톨릭은 유럽인들에게 낮은 자세를 보였습니다. 그래서 루이16세가 단두대에서 처형당할 때, 공격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물질문명이 발달하지 못한 아메리카 대륙이나 아시아 지역에서는 총칼을 들이대면서 자신들의 세력을 키워나가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전 세계인이 문명의 혜택을 누리게 되면, 상황은 백팔십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남긴 불씨는 꺼지지 않습니다.
계몽주의 사상가 디트리히 돌바흐(1723~1789)가 말했습니다.
“모든 어린이들은 무신론자로 태어나며, 그들은 신에 대한 개념이 없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태생적 창조 정신을 가지며, 문명의 씨앗으로 출생합니다.
현대인들은 누구나 교육을 받습니다.
교육을 통해서, 인류는 지식과 문화를 전수 발전시켜 왔습니다.
제대로 된 교육이 정착되면, 가톨릭의 실체도 낱낱이 드러나게 됩니다.
이처럼 나는 베르사유 궁전을 둘러보는 내내,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베르사유 궁전의 대충 둘러보고 난 다음, 가이드가 주차장을 향해 가면서 말했습니다.
“프랑스인들은 화장실 자체가 없었다고 합니다. 화장실이 없으니까, 정원 아무데서나 볼일을 보곤 했습니다. 휴지가 없어서 악취가 풍기니까 악취를 숨기기 위하여 향수 문화가 발달했다고 합니다.”
가이드의 말에 다른 사람들은 웃었지만, 나는 웃지 않았습니다.
고대 로마인들은 이탈리아반도 등줄기에 해당하는 아펜니노산맥과 인접한 지역에 살았기 때문에 흐르는 물의 원리를 이용해서 목욕탕과 수세식 변소를 만들고 문화생활을 할 수 있었습니다.
평야지대에서 살고 있었던 파리 시민은 수량이 풍부한 센 강 주변에 살고 있었으면서도 수세식 변소를 사용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정보를 교환하면서 지혜를 모으고, 회전 임펠러를 이용한 펌프를 발명하면서 파리 시민들도 수세식 변소를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처럼 지식과 정보를 공유하면, 물질문명은 발달합니다.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남긴 불씨도 되살아나면, 정신문화도 한순간에 물질문명을 따라잡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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