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 루브르 박물관과 댄 브라운의『다빈치 코드』


에펠탑 전망대에서 내려와 곧바로 버스를 타고, 루브르 박물관에 도착했습니다.
가이드가 우리를 ㄷ자 형 2층 건물 중앙에 있는 피리미트 모양의 유리 구조물 앞으로 데리고 가서 말했습니다.

“우리가 서 있는 이곳은 나폴레옹 광장입니다. 앞에 보이는 저 건물이 쉴리관이고, 좌측은 리슐리외관, 오른쪽은 드농관입니다. 파리의 심장부에 자리 잡게 된 이 건물은 1190년 지어졌을 당시 요새였습니다. 아직도 요새의 잔재가 남아 있습니다. 전쟁이 끝난 다음, 궁전으로 용도 변경을 했다가 루이14세가 베르사유 궁전을 새로 짓고 옮겨갔습니다. 그 무렵, 프랑스에서는 계몽주의 사상이 싹트기 시작하면서 군주제를 폐지하고 공화제를 선포한 극단주의자들이 1793년 루이16세를 단두대로 처형했습니다. 새로 만들어진 국민회의는 몰락한 귀족과 부패한 가톨릭교회가 소장하고 있던 물건을 이곳에 전시하면서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시 사람들은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았기 때문에 5년 동안(1796~1801) 문을 닫은 적도 있었다고 합니다. 나폴레옹1세가 여러 나라를 침략하면서 약탈한 유물과 예술품을 가지고 온 다음부터 세계적 박물관이 되었습니다."

건물에 대한 설명을 마친 가이드가 유리 피라미드 중앙 출입구 계단을 앞장서서 내려갔습니다.
나는 흥분으로 뒤끓는 가슴을 진정시킬 요량으로 심호흡을 하면서 긴장을 풀었습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회화와 조각, 건축물, 장신구, 도자기 등 고대 이집트와 동방의 고대 예술품 등 40여만 점 중에서, 3만 5000여점을 전시하고 있는데 그렇게 많은 전시품을 한꺼번에 볼 수 있다는 기대감 때문에 마음이 설레기 시작한 것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며칠 전, 바티칸시국 입국 심사를 하기 위하여 검색대 앞에 섰을 때, 나는 니체가 쓴 『안티크리스트』를 생각하면서, ‘크리스트교(기독교)는 예수의 가르침이 아니다. 신약성경은 사기다. 예수는 다른 이들을 위해 죽었다는 말도 너무나 유명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엉뚱한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나는 루브르 박물관의 예술품과 문화재를 보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유럽의 르네상스 기행을 통해서, 기독교가 어떤 방법으로 정신문화의 발목을 잡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알아보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2006년 5월19일자, 중앙일보의『다빈치 코드』 관련 기사를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니케아 공의회가 기독교 억압의 역사를 여는 프롤로그였다면, 『다빈치 코드』는 기독교 억압의 역사는 끝났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알리는 에필로그이다. 이제 그 누구도 예수가 인간이었고, 막달라 마리아와 결혼해서 자녀를 낳았고, 그 자손이 이어져오고 있다는 것과 같은, 반 기독교적 주장을 해도, 교회로부터 핍박을 당하거나 종교재판을 받거나 화형을 당하지 않아도 된다는 공개적 선언이 된 것이다. 아울러 콘스탄티누스의 니케아 공의회로부터 변질되기 시작한 기독교가, 삶의 질을 윤택하게 하고, 향상시킨 것이 아니라, 되레 민주주의와 자유와 인권을 극도의 나락으로 빠뜨리고, 인류를 커다란 불행과 재앙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이란 역사적 진실이 상식화되는 도화선이기도 하다.>

이처럼 『다빈치 코드』는 양심적 지식인들로 하여금 베일 뒤에 가려진 진실을 명확히 볼 수 있게 해주었으며, 부당한 억압과 속박과 강요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지상에서 계단을 밟고 내려가니까, 유리 피라미드 지하는 넓은 홀로 이어져 있었습니다.
안내센터, 매표소, 서점, 물품 보관소, 뮤지엄 숍이 있고, 안내센터에서 한국어로 된 팸플릿을 받았습니다.
리슐리외관에는 프랑스 예술 작품이 있고, 드농관에는 고대 로마, 에트루리아, 이탈리아 전시물이 있고, 쉴리관에는 고대 이집트와 그리스 전시물이 있다는 사실을 한 눈에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가이드의 안내로, 아름다운 인체의 황금비율로 유명한 밀로의 조각상,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이집트에서 가져왔다는 스핑크스, 다비드가 그린 나폴레옹 대관식, 그리고 총 282개의 법조문이 3,500줄의 문장으로 되어 있다는 함무라비 법전 비석 앞에서 사진을 찍었습니다.
나는 가이드의 양해를 구하고, 혼자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 <모나리자>가 있는, 드농관의 방에서 한동안 머물렀습니다.

소설, 『다빈치 코드』는 루브르 박물관장 소니에르(73세)의 살해 사건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복부에 총을 맞아 죽은 소니에르 주위에 원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벌거벗은 채 팔과 다리를 날개처럼 활짝 펴고 있어서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유명한 스케치 <비트루비우스의 인체비례> 형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옆에는 도저히 해석되지 않는 암호 같은 숫자들이 쓰여 있었습니다.
나는 박물관장 소니에르가 발가벗겨진 채 큰대자로 누워 있었다는 장소가 어디쯤일까 생각하면서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댄 브라운도 나처럼 사전 답사를 했을 것입니다.
살인사건 현장으로, 어디가 좋을까 이곳저곳을 살펴보았을 것이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종교단체의 수장이었으며, 그가 그린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 그림 속에, 인류의 비밀을 암시하는 실마리를 숨겨놓기 위하여 추리작가로써의 기교를 부리기 위하여 별의별 궁리를 다했을 것입니다.
『다빈치 코드』가 폭발적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실재하는 명화 <최후의 만찬>에 인류가 풀어야 할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독특한 가설 때문이었습니다. 댄 브라운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 등장하는 인물의 표정과 자태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처럼 묘사하면서 2천년 동안 숨겨져 왔던 비밀을 파헤치는 수법으로 추리작가로써의 역량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다빈치 코드』 메인 스토리는 새로운 창작이 아니었습니다.

프랑스 남쪽 프로방스 지방의 어느 마을에서는 작은 배를 타고 해변에 도착한 ‘막달라 마리아’와 마르다, 그리고 나사로가 도착해서 살았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은 예수가 승천하고 얼마 후, ‘막달라 마리아’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된 ‘베드로’는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워서 전전긍긍했다고 합니다.
그렇게 되니까 ‘베드로’와 ‘막달라 마리아’ 사이에 불화가 조성되면서, 위기감을 느낀 마르다와 나사로가 임신한 ’마리아‘를 배에 태우고 머나먼 항해 끝에, 프랑스 남쪽 프로방스 지방의 어느 마을에 도착했으며, 거기서 여자아이 ‘사라’를 출산했다고 합니다.
그 후, 장성한 ‘사라’가 결혼을 해서, 프랑크 왕국의 첫 번째 메로빙거 왕조의 혈통을 계승했다는 이야기가 본래부터 전해지고 있었습니다.
메로빙거는 ‘바다를 건너온 마리아’ 즉 막달라 마리아를 상징하는 이름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프랑스 남부 렌르샤토에는 막달라 마리아를 위한 건축물도 있다고 합니다.
가톨릭교회에서는 이처럼 엄청난 사실을 숨기려고 지난 몇 세기 동안 노력을 기울였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뒷받침할 만한 역사적 증거가 없다고 합니다.
『다빈치 코드』가 폭발적인 인기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최후의 만찬>에 인류가 풀어야 할 ‘숨겨진 비밀’이 있다는 가설 때문이라고 앞에서 말했는데, 이것조차도 브라운이 창작해낸 허구였습니다.
그러니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과 기독교의 <성만찬>은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종교적인 목적에서 작품을 의뢰한 후원자들 요구를 묵살하면서 이단적인 이미지를 곧잘 그려주었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 그림이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 그림을 보고 있노라면, 기독교의 종교적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리스인들의 아테네 학당을 생각나게 합니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과 학자들이 모여서 학문과 진리를 추구하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르네상스 개화기에 결정적 공헌을 한 사람입니다.
‘생각의 씨앗’ 코덱스를 그림과 설명을 곁들이면서, 다빈치는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비범함과 총명함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물질문명 전 분야에 걸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다빈치는 탐욕스럽게 보일 정도로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맨 사람이었습니다.
건축, 토목, 수학, 과학, 해부학, 공학, 음악, 비행기, 자동차, 각종 무기, 탱크, 자동소총, 잠수복, 낙하산, 콘택트렌즈, 수력자명종 등 물질문명 전반에 걸쳐서 다양한 아이디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 그가 보여준 모험적 시도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당시 성경 속 인물을 그릴 때, 당연히 넣어야 하는 머리 뒷부분의 후광을 다빈치는 넣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배경에 사람을 넣어, 성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게 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의 경우, 가롯인 유다와 다른 제자들을 구별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다빈치는 1516년 프랑스 파리에서 작품 활동을 하다가 1519년 67세에 사망할 당시 수만 장의 생각의 패러다임 코덱스를 남겼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댄 브라운이 생각한 것처럼 과거에 집착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종교단체의 수장도 아니었습니다.
'모나리자'와 '최후의 만찬'에 비밀을 숨겨 놓을 정도로 한가한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나는 앞에서도 여러 차례 말한 바 있거니와 기독교에서 말하는 성만찬은 사실무근입니다. 예수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비밀 아지트였던 다락방에 가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급히 그곳을 나와 감람산에 숨어 있었습니다. 그것 때문에 예수는 원로사제 안나스 면전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할 수 없었습니다.
그 후, 다락방 사건은 사람들 기억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다가 서기55~56년,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고린도전서11장)에 예수가 다락방에서 성만찬 의식을 주제한 것처럼 바울이 거짓 기록을 남겼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바울은 마치 다락방에 있으면서 보고 들은 것처럼 거짓말을 했습니다.
그것을 보고, 서기65~70년에 나온 마가복음과 서기85~90년에 나온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이 차용했습니다.
이처럼 역사적 근거가 전혀 없는,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한국어로 번역 출간되자, 보수주의 개신교에서는 거세게 반발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막달라 마리아가 결혼하여 딸 ‘사라’를 낳고, 사라가 결혼하여 프랑크의 메로빙거 왕조와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혈통으로 이어졌다는 내용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소설에 이어, 영화가 수입되니까 2006년 4월 7일, 개신교 보수단체와 한국기독교 총연합회에서는 영화 상영금지 가처분 소송을 법원에 제출했습니다.
그 해 5월 16일, 법원에서 영화 『다빈치 코드』가 기독교 신자들의 믿음을 흔들 수 있는 어떠한 요소도 없다는 판결문을 통해, 소송을 기각시켰습니다.
그러나 기독교 단체는 재판부의 판결에 승복할 수 없다면서, 『다빈치 코드』영화 안 보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벌였으며, 『다빈치 코드』를 비판하는 책자를 여러 권 발행하면서 민감하게 반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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