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에펠탑 전망대에서 조망하듯 신약성경 다시 보기

                                               출처 / 구글 / 에펠탑과 만국박람회

프랑스 파리에서 유럽여행 마지막 밤을 보냈습니다.
에펠탑 전망대 관람은 선착순 입장이라서, 이른 아침에 갔기 때문에 곧바로 입장할 수 있었습니다.
에펠탑은 제1전망대(57m), 제2전망대(115m), 제3전망대(274m) 구조로 되어 있었습니다.
제1전망대와 제2전망대는 계단으로도 올라갈 수 있고, 2층까지의 엘리베이터 이용료는 성인이 11유로, 걸어서는 7유로, 3층까지의 엘리베이터 이용료는 17유로이니까, 한화로 환산하면 22,600원 정도가 됩니다.
제1전망대에는 에펠탑의 역사를 전시한 미니 박물관과 우체국이 있고, 제2전망대에는 에펠탑 완공 이후, 입장한 총 인원수를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전광판도 있다고 가이드가 말했습니다.
에펠탑은 철골 구조물이라서 꼭대기 제3전망대는 온통 철조망으로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전망대에서 본 파리 시가지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가지고 간 파리 시가지 지도를 보면서 하나하나 확인했습니다.
에펠탑 북서쪽에 있는 샤이오궁과 트로카데로 광장, 남동쪽으로는 샹드 마르스 공원, 그 너머의 앵발리드의 돔, 몽파르나스 타워, 북쪽으로는 센 강과 유람선이 내려다보였습니다.
날씨가 청명해서 아주 멀리 있는 개선문도 볼 수 있었습니다.
현지가이드가 에펠탑에 대해서 말해주었습니다.

“에펠탑은 귀스타브 에펠(1832~1923)이 설계와 공사를 지휘하면서 2년여 공사 기간을 거쳐서 1889년에 완성했습니다. 높이가 300.5m로 그때까지 지어진 건축물 가운데 세상에서 가장 높은 철골 구조물이었습니다. 탑을 세우는 데 들어 간 강철이 18,000톤이고, 철골과 철골을 연결하기 위하여 사용한 나사와 리벳도 250만 개나 된다고 합니다. 1889년 5월 6일, 프랑스혁명 100주년 기념으로, 파리 만국박람회의 상징물로 세워진 에펠탑은 건축 당시, 철골 구조물이라서 파리의 우아한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반대여론 때문에 개관하고 20년이 되는 1909년에 해체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무선 전신전화가 발명되면서 높은 산이 없는 파리에서는 에펠탑이 유일하게 높은 구조물이이라서 무선 안테나를 설치하면 해체하지 않기로 결론이 났다고 합니다.”

에펠탑 해체를 주장한 사람들은 프랑스의 대표적인 지성인들이었다고 가이드가 말했습니다.
소설가 모파상, 소설가 에밀 졸라, 시인 베를렌, 작곡가 고노, 소설가 뒤마 등 300명이 넘는 지성인들이 에펠탑을 없애 달라는 탄원서에 서명했다고 합니다.
유별나게 에펠탑을 싫어했던 모파상과 베를렌의 일화도 가이드가 말했습니다.
야외에서 식사를 즐기던 모파상은 에펠탑이 지어진 뒤에는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늘 식당 안에서 음식을 먹었다고 합니다.
어느 신문기자가 왜 실내에서만 식사를 하느냐고 묻자, 파리 시내에서 에펠탑이 안 보이는 유일한 장소이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시인 베를렌은 아예, 에펠탑을 보지 않으려고 좁은 골목길로만 다녔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많은 지성인, 예술가, 언론인들이 반대를 했지만 무선통신 안테나 설치가 무엇보다도 필요한 시대가 열리면서, 철거를 하지 않고 반대로 안테나 설치를 위해 더 높아졌다고 합니다.
그 후, 에펠탑은 명실상부한 파리의 상징물이 되었다면서 가이드는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한 새로운 사실도 말해주었습니다.

“에펠탑이 완성되던 1889년, 파리 박람회에 우리나라도 참가했습니다. 그런데 출품할 상품이 없어서 사람이 타고 다니는 가마와 갓, 도포, 돗자리 등 짚으로 만든 생활 도구를 전시했다고 합니다. 1900년 파리 만국박람회에도 참가했는데, 고종의 초상화와 왕궁을 배경으로 한복을 입은 사람들 그림을 전시했다고 합니다. 그 당시 한국관 책임자였던 민영찬은 심히 보잘 것이 없어서, 찾는 사람이 없다면서 탄식조의 한탄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100여 년이 지난,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눈부신 경제 성장을 했습니다. 고도의 기술을 자랑하면서 컴퓨터와 IT강국이 되었습니다. 나는 이것이 너무 자랑스러워서 이점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면서 가이드가 활짝 웃었습니다.
활짝 웃는 가이드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책을 선물하면서 글을 쓰라고 권했던 그녀가 갑자기 생각났습니다.
“당신 이야기는 순간적인 언변으로 끝나버릴 내용이 아닙니다. 글을 쓰세요. 두고두고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나는 버릇처럼, 성경은 엉터리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 그녀가 한 말이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글쓰기에 도전을 하게 되었던 것이고, 그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신명이 나서 말하곤 했습니다.

서기30년 유월절 예비일, 빌라도 총독은 유대 왕을 사칭 했다고 고발당한 예수를 재판했습니다.
총독은 예수에게 죄가 없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가벼운 매질을 하고 방면하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왕을 사칭한 자를 풀어주면, 당신은 카이사르 충신이 아니라면서 억지소리를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화가 난 총독이 감옥에 있던 흉악범 바라바를 대신 방면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엄포용이었습니다.
그러자 그렇게 하라면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으니까,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밀어 오른 총독이 바라바를 방면했습니다.
백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총독으로써는 적절치 못한 처사였습니다.
그러자 약점을 잡았다고 판단한 누군가가 또 다시 큰소리 말했습니다.
“유대 왕을 사칭한 자를 십자가에 처하시오.”
이때부터 광기와 집단 히스테리가 발동하면서 ‘십자가’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습니다.
축제 기간 중에 민란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총독은 마지못해 십자가처형을 지시하고, 하인이 떠온 물에 손을 씻으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나는 무관하니 너희가 당하라.”
기고만장해진 무리가 신바람이 나서 말했습니다.
“우리와 우리 자손이 책임질 것이요.”
이처럼 엄포를 놓았다가 일이 커지니까, 총독은 자신의 자주색 외투를 벗어서 예수의 어깨에 걸쳐주면서 말했습니다.
“너는 이 시간부터 내가 인정하는 왕이다. 당당한 모습으로 저들에게 가거라.”
그런 다음, 왕의 행차에 시종이 따라야 한다면서 두 명의 죄수를 함께 십자가에 매달게 했습니다.
‘나사렛 사람 유대인의 왕’이라고 쓴 팻말도 십자가 형틀 위에 매달게 했습니다.
총독은 유대인들을 싸잡아,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려고 작정했습니다.
여기에는 죄의식이나 동정심 같은 것은 애당초 없었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로마군 장교 출신입니다. 냉정하고 이성적 판단을 할 수 있는 지성인이었습니다.

총독의 숨겨진 의도를 알고 있었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의 대응 방법도 유치하면서도 엉뚱한 데가 있었습니다.
예수의 시신을 달라고 해서, 동굴무덤에 넣었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을 믿는 자들이 예수의 시신을 가지고 가서 부활했다고 선전하면, 총독에게 시신을 방치한 허물을 덮어씌워 고발할 구실을 만들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은 안토니요새에서 대민업무를 보는 관원이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의 꿍꿍이속을 알 턱이 없었던 총독은, 백부장에게 예수의 생사를 확인한 다음 시신을 주라고했습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에게는 전통 장례법이 있었습니다.
사람이 죽으면 갈대로 엮은 들것에 시신을 놓고 매장했습니다. 그런데도 시신을 가져가서는 땅에 묻지 않고, 동굴무덤에 넣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대제사장 가야바가 사람을 보내, 무덤 입구를 돌로 막고 인봉을 한 다음 무덤을 지키게 하면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을 믿는 자들이 시신을 가지고 가도록 분위기를 연출했던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은 포기할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3일이 지난 다음, 가야바가 보낸 사람들이 철수하니까 어리석은 여인들이 동굴무덤에 나타났습니다. 이 때, 시신을 미리 치우고 천사를 가장한 사람이 여인들에게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여인들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사내들에게 전했습니다. 사내들은 여인들의 말을 믿지 않고 갈릴리로 돌아갔습니다.
일이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으니까, 바리새인들이 사람을 보내 갈릴리 사람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게 합니다.
그 후,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신약성경 사도행전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갈릴리로 갔던 베드로와 사내들이 예루살렘에 와서 말썽을 피우기 시작하니까, 대제사장 가야바가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을 선전하는 베드로와 무리를 산헤드린 법정에 세우고, 벌을 주려고 했습니다.
그 때, 바리새파 최고지도자 가말리엘이 베드로를 비호하는 발언을 하면서 죄를 주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던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바라던 일이 마침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바리새인들은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을 선전하는 무리들을 소탕하기 위하여 <40인의 랍비 특공대>를 만들었습니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건들은 빌라도 총독을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수순이었습니다.
서기36년, 빌라도 총독을 함정에 빠트리기 위한 그리심 산 도굴사건도 발생했습니다.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도 성행하니까, 바리새인들이 빌라도 총독이 시신을 방치해서 미신이 성행하게 되었다면서 시리아총독 비텔리우스에게 고발했습니다.
고발장을 본 비텔리우스는 빌라도 총독에게 자진 귀국을 권했습니다.
그런 다음, 그동안 안토니요새에 보관 중이던 대제사장 예복을 돌려주면서 다음과 같은 공문을 보냈습니다.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 혹은 자녀들이나 가족을 위해서, 무덤이 손상되지 않은 채 영속적으로 남아 있는 것이야말로 황제인 내가 바라는 바이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괴하거나, 악의적으로 시신을 이용하거나, 다른 장소로 옮긴다거나, 인봉을 뜯어내고 돌을 치웠다고 고소를 제기하면, 나는 재판할 것을 명한다. 어느 누구도 무덤을 훼손하지 못하게 하라. 이를 어길 경우, 무덤 훼손죄로 죽임을 당할 것이다.>

비텔리우스는 외교적 수완이 능한 사람이었습니다.
티베리우스 황제가 공문을 보낸 것처럼 둘러대면서 돌에 새긴 비석을 여러 곳에 세우라고 지시했습니다.
이것으로 서기30년 유월절에 발생했던 예수 사건은 일단락되었습니다.
그러나 <40인의 랍비 특공대>에서 활동하던 사울(바울)이 변심을 하고,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과 예수사건을 억지로 묶어서, <기독교>를 만들었습니다.
그 기독교가 창궐하면서 중세 유럽의 르네상스 개화기 때, 정신문화가 기독교에 발목이 잡히는 결과로 나타나게 된 것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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