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계몽주의 디드로와 <예수회>의 치열한 싸움

                                              출처 / 구글 / 위그노 전쟁 

스위스의 제네바에서 타고 온 T.G.V(떼제베)가 파리 근교 리옹에 도착하니까 대한민국 여행사 로고가 그려진 버스가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버스를 타고, 한국인이 경영하는 식당에 가서 늦은 점심을 먹고, 다시 버스를 탔습니다.
인솔 가이드로부터 마이크를 넘겨받은 파리 현지 가이드가 자기소개를 하면서 앞으로의 일정도 말했습니다. 

“반갑습니다. 저는 파리에서 살고 있습니다. 시인이 되려고, 한국 유명 문예지 공모전에 원고를 보내고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여러분의 많은 성원 부탁드립니다. 오늘과 내일 관광 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오늘은 샤를 드골 광장의 개선문을 보시고, 몽마르트르로 갑니다. 몽마르트르 언덕의 사크레 쾨르 성당을 보시고, 예술적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길거리의 화가들>, <반 고호>, <피카소의 집>이 있는 뒷골목을 걸어보시고, 센 강의 유람선에서 에펠탑 야경 쇼를 구경하시고 호텔로 갑니다.
내일 오전에는 에펠탑에서 파리 시가지를 조망하시고, 내려와서 점심을 드시고, 루브르 박물관을 보시고, 연이어 베르사유 궁전을 보시고, 드골 공항에서 오후7시 서울행 비행기에 탑승하시면 유럽관광 일정이 모두 끝납니다.”
가이드는 여행 일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쉬움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사전 준비를 철저히 했기 때문에 파리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숨겨두었던 기억의 편린들이 새삼스럽게 떠올랐습니다.

<청빈의 서원을 하는 것은 무위도식하는 도둑이 되겠다는 서약을 하는 것이며,
정결의 서원을 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명하신 가장 중요하고 가장 현명한 법을 영원히 짓밟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바이며,
순종의 서약을 하는 것은 인간의 양도할 수 없는 특권인 자유를 포기하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모든 서원을 지키면 하느님께 죄인이 되는 것이고,
지키지 않으면 맹세를 어기는 사람이 됩니다.
따라서 수도자는, 광신자나 위선자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계몽주의 사상가 드니 디드로가 수녀』에 등장하는 ‘쉬잔 시모넹’을 통해서 한 말입니다.
편지 형식으로 된 이 작품은 수녀원과 수도원 제도 존재 자체에 의문을 제기합니다.
수도원의 해악을 폭로하는 강력한 사회적 메시지를 가진 계몽주의 무기가 될 수 있는 작품이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수녀』는 오랫동안 위험한 작품으로 간주되어 왔으며 작품의 근저에 흐르는 노골적인 일탈된 행위 묘사 때문에, 1760년부터 집필되기 시작했으면서도 1784년 디드로가 사망하고, 12년이 지난 1796년에 파리의 뷔송 출판사가 출간했습니다.
그 후 『수녀』를 원작으로, 1996년 자크 리베트 감독이 만든 영화 <베일을 쓴 소녀>도 프랑스 사회에 커다란 반항을 일으켰기 때문에 상영금지 처분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수녀』가 18~19세기 프랑스 사회에 던진 충격은 실로 엄청났습니다.

드니 디드로(1713~1784)는 프랑스 동부 랑그르의 부르주아에서 태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성직자가 되려고 <예수회>에서 운영하는 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 대학은, 군인 출신 가톨릭 수사였던 ‘이냐시오 데 로욜라’가 1540년 교단 <예수회>를 만들고, 1547년에 설립한 학교였습니다.
디드로는 이신론과 계몽주의 책을 접하면서 신학을 포기하고, 파리 대학에서 법률을 공부한 다음(1732)부터 계몽주의 사상가가 되었습니다.
계몽주의는 이성의 힘과 인류의 무한한 진보를 믿으며, 현존질서를 타파하고 사회를 개혁하려는 데 목적을 두었던 포괄적인 개념이었습니다.

그와는 달리, <예수회>는 마르틴 루터와 칼뱅의 등장으로, 가톨릭이 위축되었을 때 프로테스탄트 타도를 목적으로 만들어졌습니다. 가톨릭 반격의 기동타격대라는 별명을 얻은 폭력 단체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발생한 ‘위그노’ 탄압에서 <예수회>는 선봉적 역할을 했습니다.
‘위그노’는 독일 남서부 지역과 스위스의 베른과 제네바 지역의 칼뱅주의 신도들이 프랑스 파리에 와서 상공업에 종사하면서 생겨난 공동체였습니다.
‘위그노’ 탄압은 36년(1562~1598) 동안, 여덟 차례나 자행되었습니다. 그것은 학살에 가까운 폭거였습니다.
프랑스 왕 앙리3세의 중재로 1589년 학살이 종식되고, 파리는 평화와 안정을 되찾았습니다.
그와 같은 사회적 혼란 중에서도, <예수회>는 교육에 역점을 두고 대학을 설립했습니다. 대학을 나온 선교사를 외국으로 파견했습니다. 인도의 서부 연안 ‘고아’를 근거지로, 중국 일본 베트남 등 동아시아 선교 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습니다.
<예수회> 선교사들은 원주민들의 언어와 문자를 배워가면서 원주민들의 사상과 문화를 파악한 다음, 현지에 학교를 세우고 자신들의 교리를 전파하는 <현지 적응주의> 전략을 채택했습니다.
그 무렵, 유럽의 상인들도 조총이나 대포를 비롯하여 무기와 탄환을 가지고 와서 판매했기 때문에 <예수회> 선교사들과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전쟁을 부추겼다는 의혹을 받고 있었습니다.

비근한 예를 들면, 1549년 선교사 ‘사비에르’가 일본 가고시마에 와서 가톨릭을 전파했습니다. 그 후, <예수회> 학교를 세우고 일본인 사제들을 배출했습니다.
그로부터 43년이 지난 1592년, 일본이 조총으로 무장한 병사들을 조선에 보내, 임진왜란을 일으켰을 때 <예수회>의 사제들도 따라다니면서 무고한 백성을 학살하고 괴로워하는 일본 병사들의 고해성사를 받았다고 합니다.
고해성사는 양심의 가책이나 죄의식에서 오는 불안과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게 도와주는 가톨릭 특유의 면죄부 의식입니다.
그것 하나만 보더라도 가톨릭의 <예수회>가 임진왜란의 배후세력이었다는 의혹을 받기에 충분했다고 봐야 합니다.

가톨릭의 기동 타격대에 해당하는 <예수회>가 전 세계적으로 활개치고 있는 가운데, 디드로는 <볼 수 있는 사람을 위하여>라는 부제가 붙은, 맹인에 관한 서한』을 1749년 출간했습니다.
디드로는 <예수회>의 고발로 102일간 벵센느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이때부터 디드로와 <예수회>의 치열한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디드로는 『맹인에 관한 서한』을 가지고 자연의 경이로움을 허물어버렸습니다. 인식은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사물이 우리의 뇌리에 반영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볼 수 있는 사람과 맹인이 동일하게 사물을 인식한다면서 진리는 객관적인 것이고, 진리인지 아닌지는 경험에 의해 확인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가톨릭을 향한 도전이었습니다.
명석한 두뇌의 소유자였던 디드로는 미래를 내다보면서 양면 작전으로 나왔습니다.
벵센느 감옥에 있을 때 유물론적 인식론이 완성되었을 뿐만 아니라 맹인에 관한 서한』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극단적인 작품을 구상하고 연이어 발표했습니다.
사후에 발표되었지만, 수도원의 해악을 폭로한『수녀』,
모순을 파헤치고 허위로 가득 찬 세계를 다룬『운명론자 자크』,
철학자의 권위적 논의가 무뢰한의 어설픈 얘기에 역전되는『라모의 조카』가 대표적인 작품입니다.
그처럼 바쁜 와중에서도, 디드로는 벵센느 감옥에 투옥되기 전이었던 1745년, 한 출판업자로부터 영국의 체임버스가 발행한 『백과사전』의 프랑스어 번역을 의뢰받았습니다.
처음에는 달랑베르(1717~1783)와 함께 번역만 하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감옥에 있으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새롭게 편집하는 『백과전서』에, 가톨릭교회의 비판을 비롯하여 중세적 편견 타파, 전제정치 비판 등 불합리한 권위에 도전하는 내용을 담기로 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백과전서』는 훗날 프랑스 대혁명의 사상적 토대가 되었으며 그렇게 되기까지 디드로는 혼신에 노력을 다했습니다.
20여 년에 걸쳐서 편집된 『백과전서』에는, 당시 계몽주의 사상가들이 총동원 되었습니다. 본문 17권과 도판 11권이 완성되기까지 <예수회>의 성직자들은 자신들의 철학적 입장을 위태롭게 한다면서 출판을 방해했습니다.
그러나 디드로는 내용을 먼저 공개하면서 보충하는 방법을 썼기 때문에, 구독자가 4천 명으로 늘어났습니다.
『백과전서』가 유물론을 주장하고, 종교를 파괴하고, 자유정신을 고취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여론을 의식한 프랑스 검찰은 <예수회>의 고발에도 불구하고 디드로를 구속하지 못했습니다.
이와 같은 내용들을 나는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 도서관과 인터넷 검색을 통해서 이미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기억을 되살리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낼 수 있었습니다.
버스가 파리의 개선문 앞에 도착하고, 우리는 버스에서 내렸습니다.

가이드가 개선문을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개선문 광장은 방사형으로 뻗은 12개의 도로가 마치 빛나는 별과 같은 모양이라서, 예전에는 에투알(별) 광장이라고 했습니다. 개선문은 그 이름대로, 프랑스군의 승리와 영광을 기념하기 위하여 나폴레옹 1세의 지시로 만들어졌습니다. 이 개선문은 로마의 티투스 개선문을 본떠 만들었다고 합니다.”
개선문을 둘러보는 동안에도 가이드의 설명은 이어졌습니다.
동서남북 네 면에 새겨진 조각상과 부조는 나폴레옹 1세의 승리와 공적을 모티프로 제작된 것이고, 개선문 아래에는 1,2차 세계대전에서 사망한 무명용사들의 유골을 합장한 무덤이라고 했습니다. 무덤 바로 위 지상에서는 꺼지지 않는 횃불이 타오르고 있었습니다.
매표소에서 입장권을 산 사람들이 계단을 오르거나, 지하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전망대로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가이드는 다시 우리를 버스에 태우고, 창작과 예술의 발원지 몽마르트르 언덕으로 안내했습니다. 파리 시가지를 내려다 볼 수 있는 언덕을 오르는 계단에는 관광객들로 붐볐습니다.
사크레 쾨르 성당 앞에서 가이드가 말했습니다.
“이 성당은 1871년 보불전쟁에서 패전한 후 조국의 번영과 평화를 위해 세운 교회입니다. 파리 국민의회는 건축을 의결하고, 국민 헌금으로 1914년 완성했습니다.”
가이드는 우리를 성당 바로 옆 주거지역으로 안내했습니다.
비탈진 주거지역에는 반 고흐의 집을 비롯하여 근대 미술사에 공헌한 예술가들의 이름과 포스터가 붙어 있었습니다.
몽마르트르 언덕이 창작과 예술의 장소가 된 배경도 가이드가 말했습니다.
“1900년을 전후로 파리의 집값은 비싸서 노동자, 건달, 가난한 화가, 삼류 가수들이 이곳 빈민촌에서 살았습니다. 이처럼 낙후된 환경이 화가들에게 영감과 창의력을 키우는 토양이 되었던 겁니다. 피카소도 이곳의 허름한 집에서 작품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시인이 피카소의 집을 센 강에서나 볼 수 있는 허름한 세탁선 같다고 말한 이후, 그렇게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피카소가 살면서 그림을 그렸다는 집을 알려주고, 가이드가 시계를 보면서 서둘러 주차장으로 가자고 했습니다.
나는 가이드가 말하지 않은, 또 다른 사실 하나를 더 알고 있었습니다.

1534년, 가톨릭 수사 로욜라는 제자 여섯 사람과 함께 이곳 몽마르트르 언덕의 허름한 집에서 가톨릭의 기동타격대 <예수회>를 만들자고 뜻을 모았습니다.
그러니까, 몽마르트르 언덕은 창작과 예술의 장소이기도 하려니와 디드로와 같은 계몽주의 주창자들을 옥에 가두거나 괴롭히던 <예수회>가 생겨난 곳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다시 버스를 타고, 점심을 먹었던 식당에 가서 저녁 식사를 하고, 샌 강 선착장으로 갔습니다.
유람선이 센 강의 시테 섬을 한 바퀴 돌았을 때, 가이드가 넌지시 나에게 말했습니다.
“시테 섬은 파리의 발원지입니다. 기원전52년,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 군대가 시테 섬을 점령하면서 역사에 등장했으며 『갈리아 전기』에, 시테 섬에 파리시족이 살고 있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그 기록이 파리의 어원인 셈입니다. 게르만 민족이 침입 했을 때도 시테 섬은 센 강 때문에 무사했습니다. 6세기 초 프랑크 왕국이 북쪽 라인 강에서 남쪽 루아르 강까지 넓은 영토를 차지했을 때도 시테 섬이 행정의 중심지였습니다.”
시테 섬에는 노트르담 성당, 시립 병원, 파리 경시청이 있다는 말도 했습니다.
센 강의 유람선 관광 하이라이트는 에펠탑의 점등식이었습니다.
휘황찬란한 회전식 조명이 한꺼번에 켜지는 순간, 모두들 아! 하면서 탄성을 자아냈습니다.
1시간 남짓 유람선 관광을 하고, 호텔로 이동했습니다.

귀국한 다음, 나는 <예수회>가 1547년 프랑스 파리에 학교를 설립한 이래, 얼마나 많은 대학을 설립했는지 궁금해서 인터넷 검색으로 알아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전 세계 100여개 국가에, 226개의 종합대학과 단과대학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에는 서강대학과 광주 가톨릭대학교의 전신이었던 대건신학대학이 있고, 미국에는 보스턴 칼리지, 노트르담 대학교, 조지타운 대학교, 로욜라 대학교, 포덤대학교가 있었습니다.
일본에는, ‘소케이조’라고 일컫는 죠지대학이 <예수회>가 설립한 학교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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