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최후의 만찬> 논쟁으로 분열된 개신교

                                                    출처 / 구글 / 신구교 분포도

스위스 인터라켄 호텔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침, 우리는 프랑스 파리를 가려고 버스를 탔습니다.
스위스에서 파리로 가려면 바젤, 베른, 로잔, 제네바에서 탑승하는 네 개의 열차노선이 있습니다. 좌석 배정이 여행일정과 맞지 않을 경우, 탑승역이 변경될 수 있다고 안내 책자에 적혀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까운 베른이나 로잔으로 가지 않고, 레만 호 끝자락에 있는 제네바로 갔습니다.
로마에서부터 우리의 발이 돼 주었던 버스는 목적지에 도착하기 무섭게, 우리와 반대 방향으로 가는 다른 관광 팀이 있다면서 독일로 갔습니다.
기차역 대합실의 안내 표시판을 보니까, 파리까지 540km이고, 우리가 타고 갈 T.G.V(떼제베)는 파리 근교의 리옹 도착 시간이 오후1시3분이었습니다.
가이드가 준 티켓을 보니까, 출발하기까지 1시간 정도 여유가 있었습니다.
제네바는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서 이주한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이 발전시킨 도시입니다. 시가지 구경을 하려다가 포기하고, 가이드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제네바를 찾는 관광객도 있나요?”
“아주 많습니다.”
가이드는 지극히 당연한 걸 묻는 내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으면서 말했습니다.
제네바는 시계공업이 발달한 도시입니다. 은행이 많아서 스위스 금융업의 중심지이고, 종교개혁자 칼뱅(1509~1564)이 살았던 곳이라서 종교개혁 기념비도 있습니다. 선교사 양성을 위한 종합대학도 있습니다.”
나는 칼뱅(칼빈)에 대해서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묻지 않았습니다.
가이드는 내가 묻지 않았는데도 스위스 역사에 대해서 말했습니다.
“스위스는 로마의 집정관 카이사르가 갈리아를 정복한 기원전58년부터 로마의 속주였습니다.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열되던 서기400년까지, 로마에서 지명한 총독과 용병대장이 스위스를 통치했습니다. 용병 대장 중에는 게르만 출신 오도아케르(433~493)와 같이, 군사와 정치 감각이 뛰어난 사람도 있었습니다. 오도아케르는 그 당시 16세였던 서로마 황제 아우구스툴루스를 퇴위시키고, 서기476년 서로마를 역사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한 인물입니다.”
그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나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고개만 끄덕이니까 가이드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습니다.

서로마제국을 멸망시킨 오도아케르가 죽고, 게르만계의 프랑크족이 세운 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으로 추대 된 클로비스(465?~511) 역시, 지략이 뛰어난 사람이었습니다.
군단 병력이 월등히 많고, 문화도 훨씬 앞선 로마인들을 지배할 방법을 찾던 중, 제51대 가톨릭교황 심마코(498~514)와 친밀한 관계를 맺으면서, 프랑크 왕국을 서유럽 중심 국가로 만들고 나서, 362년 동안 국위를 떨쳤습니다(AD481~843).
이처럼 가톨릭은 프랑크 왕국과 밀월관계를 유지하면서 교세 확장에 주력했습니다. 프랑크 왕국 이후에도 프랑스와 독일에서 건재를 과시했습니다.
그러다가 독일에서는 마틴 루터(1483~1546)가 종교개혁 선봉에 섰습니다.
스위스에서는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가 종교개혁을 부르짖었습니다.
루터보다 나이가 한 살 적은 츠빙글리는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습니다. 가톨릭을 배척하면서, 성경의 가르침에 따라 사회의 규범을 단번에 뜯어 고치려고 했습니다.
츠빙글리는 1524년 9월에 완성한 논문집 『참 종교와 거짓종교에 관한 주석』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1세에게 헌정했습니다. 이 논문집을 프랑스 파리의 소르본대학 신학자들에 의해 검토되기를 기대하면서 보냈습니다. 가톨릭 교황은 죄에 굴복한 인간으로서, 적그리스도라고 비판하는 내용이었습니다.

루터와 마찬가지로, 츠빙글리는 프랑스 정부가 나서서 가톨릭의 잘못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스위스 사람들은 츠빙글리의 개혁에 동조하면서 환영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면서 청빈을 강조했을 뿐만 아니라 알프스산맥을 통과하는 여행객들에게 숙식을 제공하면서 돈을 받는 행위가 옳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여행객을 상대로 숙박업을 하던 사람들이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젊은이들이 외국에 나가서 용병으로 돈을 버는 것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다고 말했습니다. 남편이나 아들이 용병으로 가 있으면서 그들이 보내오는 돈으로 생계를 꾸려나가던 산악지역 사람들이 츠빙글리에게 불만을 품고, 다시 가톨릭 신도가 되었습니다.
그 후, 산악지역에서는 가톨릭이 우세하였고, 도시에서는 개신교가 우세하는 양극화가 심화되었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1520년 중반부터 서신을 주고받았습니다. 신학적인 문제로 논쟁을 했습니다. 1527년부터는 논쟁의 초점이 <최후의 만찬>의 성만찬에 모아졌습니다.
츠빙글리는 성만찬에서의 떡과 포도주는 상징적인 의미라고 주장했습니다. 떡과 포도주는 실제로 육신의 몸과 피가 된다는 루터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했습니다.
루터는 츠빙글리의 상징적 논리를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단적 견해라면서 반박했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는 무의미한 논쟁을 되풀이했습니다.
떡과 포도주 논쟁은 시중에 떠도는 유언비어에 기인한 것으로서, 그 실체를 확인할 수 없는 언어적 유희였습니다.
이처럼 오해와 논쟁의 소지가 많기 때문에, 가톨릭은 아예 신약성경을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신약성경은 서기397년에 27권으로 확정되었습니다. 이때, 편집에서 제외된 수많은 문서들을 외경 또는 가경이라고 합니다. 바울의 서간문을 제외하면, 신원미상의 작가들이 쓴 출처불명의 검증되지 않는 문서들입니다.
그래서 가톨릭은 화가들로 하여금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과 천박한 지성을 명화로 그리게 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종교적 감동과 종교 외에는 다른 세상을 생각할 수 없게 만들었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루터와 츠빙글리는 막무가내로 성경을 절대 진리라고 주장하면서 무조건 믿어야 구원을 받는다면서 억지소리를 했습니다.

루터와 츠빙글리가 논쟁을 벌인 <최후의 만찬>도 알고 보면, 작가적 상상력이 뛰어난 바울이 만든 그럴듯한 스토리였습니다.
예수는 유월절이 되기 3일 전에,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예비일 전날, 예수는 베다니 사람들을 따라 어느 다락방에 갔습니다.
그곳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비밀 아지트였습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따라갔던 예수는 급히 감람산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가 주도적 역할을 한 것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서기55~56년, 바울이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고린도전서11장)에 <최후의 만찬> 이야기가 들어 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하지만 서기30년 예수사건 당시, 바울은 20세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소아시아의 남동쪽에 위치한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그리스 문화의 교육을 받고, 로마시민권을 가졌으며, 예루살렘에 와서는 바리새파 최고지도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업을 이수했습니다.
바울은 당시 유행하던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과 십자가상에서 죽은 예수가 다락방에 간 것을 가지고 <최후의 만찬>이라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만들어 냈습니다.
바울은 다락방에 없었습니다. 순전히 작가적 상상력으로 꾸며낸 이야기였습니다.
이처럼 거짓 이야기를, 서기65~70년에 나온 마가복음이 차용했습니다.
서기85~90년에 나온 마태복음과 누가복음도 차용했습니다.
그러나 80~90년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복음에는 떡과 포도주 이야기가 없습니다.
이처럼 <최후의 만찬>은 날조해 낸 거짓말입니다.
그런데도 루터와 츠빙글리는 요란을 떨면서 논쟁을 했습니다.

츠빙글리가 사망하고(1531), 얼마 후, 프랑스 태생의 칼뱅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 바젤로 망명하고는 27세 때인 1536년에 기독교 강요를 발표하였습니다.
이 책은 박해받는 프랑스 프로테스탄트주의를 보호하기 위해 저술되었다고 합니다.
복음주의의 고전으로 일컬어집니다. 칼뱅은 종교개혁 운동에도 참여하였는데, 철저한 신권 정치를 지향했기 때문에 스위스에서 추방당하여 프랑스로 돌아갔습니다.
그 후 개혁 교회의 목회자로서 신학교에서 강의를 하면서 지내다가 3년 후 다시 제네바로 돌아와서 교회 제도를 정비하고, 이를 바탕으로 엄격한 ‘신권정치’를 실행에 옮겼습니다.
이처럼 정치적 색체가 분명하니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칼뱅파는 유럽 전역에 세력을 확장하면서 지역마다 이름을 달리 하는 세력이 생겨났습니다.

영국에서는 퓨리턴(청교도), 스코틀랜드에서는 장로교,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네덜란드에서는 고이센(거지당)이라고 불렸습니다. 그들은 유럽 여러 나라에서 시민 혁명의 주체세력이 되었습니다.
가톨릭에서도 이들과 맞서기 위하여 개혁파가 생겨났습니다. 1534년에 결성된 예수회(제수이트)는 가톨릭 세력을 회복하는 데 큰 역할을 했습니다.
예수회를 창설한 사람은 에스파냐의 이그나티우스 로욜라(1491~1556)와 그의 친구 프란시스코 자비에르(1506~1552)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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