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신약성경에서 발견한 아킬레스 건

                                              출처 / 구글 / 크레모나

르네상스 개화기 이후, 가톨릭은 거센 비난과 존립의 위기를 겪으면서 발 빠르게 대응했습니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화가들로 하여금 천박한 지성을 명화로 그리게 했으며, 사람들을 속이기 위하여, ‘버니의 요술거울’도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본래부터 가지고 있던 치명적인 약점, ‘아킬레스건’을 완벽하게 감추고 숨기지 못했습니다.
‘아킬레스건’은 비유적 표현입니다. 고대 철학자 호메로스가 쓴 『일리아스』에서 유래했습니다.
아킬레스는 사람의 이름이었습니다. 아킬레스의 모친 테디스는 아들을 불사신으로 만들기 위하여, 갓난아이를 스틱스 강에 넣었습니다. 그 때, 아이의 발목을 잡고 있었기 때문에, 발목에는 강물이 닿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사람의 몸에서 가장 튼튼한 힘줄이, 약한 부위가 되고 말았습니다.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고, 적이 쏜 화살이 하필이면 발목에 맞아서 아킬레스가 죽었습니다. 그 후, 치명적인 약점을 가리켜, ‘아킬레스건’이라고 합니다.
신약성경에도 치명적인 약점, ‘아킬레스건’이 수두룩합니다. 치명적인 약점이 사회적 이슈로 떠오를까 봐 가톨릭은 전전긍긍, 노심초사하고 있습니다.

베네치아 관광을 마치고, 다음 목적지 밀라노를 향해서 우리가 탄 버스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면서 고속도로를 달렸습니다.
우측 차창으로는 알프스 산맥의 봉우리들이 들쑥날쑥 보였습니다. 좌측 차창으로는 드넓은 평원이 펼쳐졌습니다.
가이드가 차내 방송을 통해서 말했습니다.

“여러분이 보시는 저곳이 롬바르디아 평원입니다. 예로부터 이곳은 교통의 요지였습니다. 영토를 서로 차지하려고 전투가 벌어지곤 했습니다. 밀라노에서 남동쪽으로 약 80km 위치에 있는, 크레모나(베드리아쿰)는 상주인구 8만 여명의 작은 도시인데도 현악기 제작의 메카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바이올린과 비올라를 제작한 곳입니다. 유명한 화가 줄리오 캄피(1502~1572)가 설립한 미술학교도 있습니다. 옛날 현악기들을 한자리에서 볼 수 있는 박물관과 바이올린과 비올라 제작과정을 가르치는 학교도 있습니다. 이탈리아 유일의 음악고문서 연구대학도 있습니다.”

현악기는 수렵시대 사람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놓을 때 들리는 ‘휭~휭’ 소리에 착안하여, 궁현악기를 만들어 썼던 데서 비롯되었다는 기록을 어디선가 본 적이 있습니다.
가이드는 전쟁터였던 롬바르디아 평원과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현악기가 무슨 관련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 같았습니다.
가이드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크레모나는 기원전218년, 로마인들에 의해서 건설된 도시로, 상업 중심지로 발전했습니다. 서기69년, 이집트에 있던 베스파시아누스가 보낸 군대와 아룰루스 비텔리우스가 보낸 군대가 롬바르디아 평원에서 싸웠습니다. 이집트에서 올라 온 군대가 승리하면서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에 올랐습니다.”

가이드가 하는 말을 들으면서, 또 다시 나의 뇌세포에 저장되었던 기억들이 일시에 되살아났습니다.
심사숙고 끝에 얻은 소중한 결론도, 앞으로는 소신을 갖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는 용기도 얻었습니다.
‘서기70년, 예루살렘 멸망’은 로마인들과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자중지란을 일으키면서 유대를 파국으로 몰고 간, 종파분자들의 주도권 다툼이었습니다.
종파분자들의 하는 짓거리가 도를 넘었다고 판단한 티투스 장군이, 단숨에 평정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루살렘 멸망은 유대인들의 자멸적 행위였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이 사회적 이슈가 되면, 세상이 떠들썩할까 봐 가톨릭은 노심초사하고 있다고 나는 보고 있습니다.

가톨릭은 서기70년 유대 멸망을, 로마인들의 폭정과 박해 그리고 침략으로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서기65~70년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가복음. 85~90년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태복음과 누가복음, 80~90년경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복음은 하나같이 서기70년 예루살렘 멸망에 대해서 구체적인 이야기가 없습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재앙을 선포하는 예언자가 나옵니다. 그 기사는 서기70년 예루살렘 멸망과 관련이 없습니다. 서기40년 칼리굴라가 예루살렘 성전에 유피테르 신상을 세우라고 지시했다가 살해당하고,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가 신상 건립을 없었던 일로 하라고 지시하면서 해프닝으로 끝난 이야기였습니다. 그것을 서기30년 예수가 감람산에서 한 것처럼 날조했습니다.
신원미상의 사복음서 작가들은 예루살렘 멸망을 경험했거나 자세히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구체적 언급이 없다면, 종파분자들의 자중지란으로 자멸했다는 방증자료가 됩니다.
서기43년 헤롯의 손자 아그립바가 유대 왕으로 있을 때, 유언비어 날조로 베드로가 감옥에 있다가 아그립바가 죽고, 탈옥한 기사가 있습니다.
바울은 유언비어 날조로 서기58년에 체포되었습니다. 안토니오 벨릭스 총독(AD52~60) 재임 기간 중이었습니다.
사도행전23장에 보면, ‘이 자(바울)는 염병이라, 천하에 퍼진 유대인들을 다 소요케 하는 자요, 나사렛 이단의 괴수’라는 문구가 있습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베드로와 바울은 예루살렘 멸망의 주역이었거나 동조 세력이었습니다. 바울이 한 허튼소리도 로마서5장에 있습니다.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이처럼 과대망상에 사로잡힌 종파분자들은 서기70년 예루살렘 멸망을 통해서 소원을 성취를 했다고 봐야 합니다.

유대인들의 자멸적 행위가 막바지로 치닫고 있을 때, 로마의 정예부대는 시리아 국경선 너머 파르티아의 동향을 살피면서 유대인들의 소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네로 황제의 실정으로 정국이 불안했습니다. 그 때문에 시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로마군은 막강한 전투력 강화에 힘쓰고 있었으며, 시리아 총독이 군단 사령관을 겸직하고 있었습니다.
시리아 총독 코르불로(AD60~63), 갈루스(AD63~67), 무키아누스(AD67~69) 세 사람은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용맹스러운 사령관들이었습니다.
코르불로는 도미티우스 씨족의 코르불로 가문 출신입니다. 기원전3세기 후반부터 서기6세기 중반까지 가장 뛰어난 15명의 사령관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습니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처럼 전략에 뛰어났고 부하를 아끼는 지휘관이었습니다.
코르불로는 아르메니아 문제로 마찰을 빚었던 파르티아와의 외교 문제를 해결한 다음, 로마에 가서 네로 황제를 보좌했습니다. 젊은 장교들이 비밀리에 황제로 추대하려고 일을 꾸미다가 밀고자가 있어서 실패하고, 코르불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AD63).
갈루스는 코르불로의 수석 참모였습니다. 상관이 로마로 가면서 사령관을 이어받았습니다. 서기66년 10월 중순경, 유대총독 폴로루스가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갈루스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가던 중 병을 얻어 투병 중에 있었고, 아그립바2세가 달려와서 자기가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말했습니다. 갈루스는 아그립바2세에게 맡기고 시리아로 돌아갔습니다.

무키아누스는 갈루스의 수석 참모였습니다. 서기67년 갈루스가 병으로 죽고, 시리아 총독과 군단 지휘권을 이어받았습니다.
그 무렵, 베스파시아누스가 지금의 터키 남부 오론테스 강 동쪽에 위치한 안디옥에 병력을 주둔 시키고 시리아로 달려갔습니다.
출신성분이 낮은 베스파시아누스는 젊은 시절,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3인방이었던 나르키소스의 눈에 들어 로마군 지휘관이 되었습니다.
브리타니아 침공에 참가해서 선봉대장으로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20개가 넘는 도시를 수중에 넣었습니다(AD43). 그때 무키아누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하급 장교였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집정관을 역임했습니다(AD51). 나르키소스가 자살(AD54)한 다음부터, 아무런 직책도 얻지 못했습니다. 양봉업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다가 페트로니우스의 추천으로 다시 아프리카 총독으로 갔습니다(AD63).
서기66년 가을, 로마로 돌아온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의 수행원으로 그리스로 따라갔습니다. 황제의 음악 공연 중에 잠시 졸았습니다. 이 모습을 본 네로가 자기를 무시했다면서 죽이려고 했습니다.
페트로니우스가 기지를 발휘하여, 죽음을 모면했습니다.
“오르페우스는 노래로 맹수를 잠들게 했다지만, 보시다시피 베스파시아누스를 잠들게 한 폐하의 실력 또한 그에 못지않습니다.”
네로 황제는 서기64년부터 있으나마나한 존재였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의 경우처럼 사람을 알아볼 줄 몰랐습니다. 국정도 돌보지 않고 놀기만 하다가 측근들로부터 외면을 당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변방의 사령관들이 기회를 노리고 있었습니다.

서기67년 2월, 베스파시아누스는 3개 군단 병력을 할당받고 사령관이 되었습니다. 7월 병력을 이끌고 안디옥으로 갔습니다. 무키아누스가 시리아 주둔 군단 사령관이 되 것을 알고 찾아갔습니다.
두 사람은 모종의 약속을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갔습니다.
나일 강 삼각주에 있는 황실 농장 책임자는 유대인 필로의 동생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이집트 총독이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들 부자를 포섭하여, 수확한 곡물을 로마로 운송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 바람에 네로에 대한 로마시민의 원성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티투스와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제위에 오르게 하려고 일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네로 집권 말기,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사령관 중에서 제일 먼저 도전장을 낸 사람은 이스파니아 총독 갈바였습니다.
그런데 원로원은 갈바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습니다. 그렇지만 근위대 병사들은 더 이상 네로 황제를 지켜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겁에 질린 네로는 6월9일 로마 인근 은신처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습니다(AD68).
네로가 죽고, 73세 고령의 갈바가 로마에 와서 제위에 올랐습니다(AD69). 그해 겨울, 내전을 원치 않았던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되려던 생각을 접고, 티투스를 축하 사절로 보냈습니다. 티투스가 로마로 가던 중 코린트에서 갈바의 살해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습니다.
갈바는 원로원이 자기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 앙심을 품고 있다가 로마에 와서 정적들을 처형했습니다. 그런 다음, 후계자를 정할 때, 근위대 병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오토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지명했다가 제위에 오르고 7개월이 되던 1월15일 오토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새 황제가 된 오토는 경쟁 상대였던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와 싸워야 했습니다.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로마를 향해 오고 있는 사이에 오토가 갈바를 살해했던 것입니다.
그 당시 37세였던 오토는 자기 휘하 병사들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했습니다. 부친,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후광으로 막강한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던 비텔리우스(54세)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롬바르디아 평원에서 싸우다가 전세가 불리하자, 이 소식을 전해들은 오토는 4월16일 자살했습니다. 황제가 되고 3개월만의 일이었습니다.
원로원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승인했습니다. 그런데도 두어 달이 지난 6월 말경에야 수도 로마에 왔습니다. 이집트에 있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의식하면서 눈치를 보다가 조용하니까 안심하고 제위에 올랐습니다.
황제가 된 후, 날마다 파티를 열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네로 때문에 파탄 난 황실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황제 옹립의 일등공신이었던 카이키나의 불신을 사게 되었고, 휘하 장병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의 정세를 예의 주시하던 티투스와 무키아누스가 서기69년 7월1일,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무키아누스가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습니다.
10월24일 롬바르디아 평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비텔리우스가 보낸 군대와 전투가 벌어졌습니다. 이때 필로의 조카 ‘알렉산더’와 요세푸스, 그리고 다른 유대인들도 참전했습니다.
로마에 있던 비텔리우스는 전세가 불리하자, 제위에서 물러나겠다고 먼저 말했습니다. 그런데도 근위대 병사들과 로마시민이 황궁으로 몰려가서 황제를 결박하고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조롱하다가 12월20일 살해하고 시신을 테베레 강에 버렸습니다.
12월21일,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새 황제로 승인했습니다. 그런데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서 오지 않고 열 달이 지난 서기70년 10월에 로마에 왔습니다.
그 열 달 동안, 무키아누스는 수도 로마의 치안을 안정시키면서 이탈리아 북부 갈리아 주민들이 입은 피해를 원로원 의원들이 보상하게 했습니다. 그곳 비텔리우스 지지자들의 반역을 사전에 막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무키아누스는 신분이 낮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권력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하여 원로원을 소집하고, ‘황제 법’을 통과시켰습니다.
이처럼 내란 진압과 갈리아 반란을 사전에 차단한 무키아누스는 자신의 전과를 내세우지 않았습니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에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열 달 동안 이집트에 있으면서 바닥난 황실 재정 복구에 주력했습니다. 황실 소유 토지 일부를 팔고, 유대와 그리스 부자들로부터 돈을 거두어들였습니다. 이때 필로와 황실 농장 책임자였던 동생의 역할이 컸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유대인 ‘알렉산더’를 근위대 대장으로 임명하면서 유대인들에 대한 신뢰가 돈독하다는 사실을 보여주었습니다.
이처럼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 있으면서 재정 확보에 주력하는 동안, 무키아누스는 로마에서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있었고, 티투스는 파르티아 인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티투스는 부친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옹립에 정신이 없었고, 베스파시아누스가 유대인들을 신뢰했기 때문에 유대인들을 핍박할 하등의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티투스의 박해로 유대 반군의 봉기가 있었으며, 로마군의 무차별 공격으로 서기70년 예루살렘이 함락되었다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가톨릭과 개신교가 하고 있으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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