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헤롯의 유아살해는 새빨간 거짓말

                                               출처 / 구글 / 베네치아

영국의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1892~1982)는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잠언에 가까운 충고를 했습니다.
‘역사적 사실은 순수한 상태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법이 없다. 역사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역사가를 연구하라. 역사가를 연구하기에 앞서서 우선 그의 역사적 사회적 환경을 연구하라. 현재를 거울삼아 과거를 통찰하고, 과거를 거울삼아 현재를 바라보며,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를 통해서만이 더 나은 미래를 창출할 수 있다.’

잠언에 이어서, 무거운 책임감을 느끼게 하는 내용도 덧붙였습니다.
‘우리는 재래의 역사를 청산하고, 하나의 역사에서 다른 하나의 역사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도달한 경지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의 처지는 어떻습니까?
재래의 역사를 청산하고, 우리가 도달한 경지를 후손들에게 보여줄 수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르네상스 개화기 이후, 물질문명은 눈부시게 발전하면서 경이적으로 향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신문화는 종교에 발목이 잡혀, 꼼짝달싹도 할 수가 없습니다.
정신문화는 종교, 학문, 예술, 도덕 등 정신세계를 아우르는 영역입니다.
물질문명은 보다 더 실용적인 공업, 농업, 어업, 과학, 의학, 기계 등 물질적인 방면의 움직임을 가리킵니다.
정신문화와 물질문명이 다정한 형제처럼 손에 손을 잡고 동반성장을 해야, 더 좋은 세상을 바라보면서 희망의 나래를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정신문화가 종교에 발목이 잡혔으니, 이를 어쩌면 좋다는 말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원초적인 문제입니다.
진퇴양난의 궁지에 빠진 쥐가, 고양이에게 덤벼드는 막장 드라마를 연출할 수밖에 없게 되었습니다.
주변을 한 번 둘러보세요.
생명경시 풍조가 만연하면서 ‘게임방’에서는 사람의 목숨이, 파리 목숨처럼 가벼이 여기는 오락을 청소년들이 즐기고 있습니다.
성당이나 교회에서는, 십자가상에서 죽은 누군가를 향해서 두 손을 모우고 기도합니다.
황당무계한 설교자 앞에서 뜻도 모르면서 아멘, 아멘, 합니다.
십자가상에서 처참하게 죽은 사람을 보면서 잔인함, 어리석음, 무지, 미신의 이미지가 떠올라야 정상입니다.
거기서 사랑과 용서와 구원을 생각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술 취함이고, 온갖 논리로 분칠한 궤변에 놀아난 꼴이 됩니다.
그런데도 기독교인들은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다니거나, 십자가 앞에서 한결 같은 신앙을 고백합니다.

예수가 태어나기 전부터,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이 유행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라스뮈스’는 『우신예찬』으로, 가톨릭을 조롱했습니다.
그런데도 정신문화는 하나도 달라진 것이 없습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요?
현재를 거울삼으라는 에드워드 카의 말이 무색하게도, 엄청난 음모가 도시라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은 발 빠르게,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화가들로 하여금 천박한 지성을 명화로 그리게 했습니다. 그런 다음 ‘버니의 요술거울’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이 만들었습니다.
‘버니의 요술거울’ 앞에 서면, 나는 보이지 않고 엉뚱한 것이 나타납니다.
아이들 동화에나 있을 법한 요상한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습니다.
현실을 제대로 인식할 수 없게 합니다. 그러니 과거 되찾기는 불가능해졌습니다.
작정하고 나선 이번 여행도, ‘버니의 요술거울’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런던, 로마, 바티칸시국, 피렌체, 그리고 베네치아에 오기까지, 어떻게 하면 우리를 감쪽같이 속이는, 요술거울이 있다는 사실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 그것만 생각했습니다.
‘메르체리 거리’를 둘러보고, ‘플로리안 카페’에 갔습니다.
누군가와 만나자고 약속을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카페 앞 탁자에 앉아서 유명 작가들 이름을 하나하나 떠올려 보았습니다.
루소, 스탕달, 바이런, 셸리, 바그너, 디킨스, 하이네, 니체, 릴케, 헤밍웨이, ….
그들 또한 나처럼, 편집인 마누치오와 ‘알도출판사’를 생각하면서 커피를 마셨을 거라고 상상하니까 외롭지 않았습니다.
곤돌라를 타려갔던 사람들이 산마르코 광장의 종탑으로 모이는 시각에, 나도 그곳으로 갔습니다.

인원 점검을 마친 가이드가 산마르코 관장에 있는 성당을 가리키면서 말했습니다.
“저, 성당은 가톨릭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그리스 성인 테오도르를 기념하기 위하여 만든 건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상인이라고만 이름이 알려진, 트리부노와 루스티코 두 사람이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의 어느 수도원에서, 예수의 제자 마르코(마가)의 유골을 훔쳐 가지고 온 다음부터, 가톨릭 성당으로 용도가 바뀌었습니다.”
나는 가이드의 말을 들으면서, ‘버니의 요술거울’이 저기 있구나! 혼잣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가이드가 다시, 광장 남서쪽 대운하 지역에 있다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 쪽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저 곳에 있는 성당은 1630년 페스트가 유행하면서 베네치아 인구의 20퍼센트에 해당하는 4만7000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성모 마리아에게 감사를 표시하기 위하여 세운 성당입니다. 성당에는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조각과 성화가 장식되어 있습니다. 베네치아 사람들은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가 페스트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했다고 믿기 때문에 세운 성당이라고 합니다.”
이번에는 콧방귀를 뀌면서, 저것도 요술거울이라고 혼잣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두칼레 궁전으로 우리를 안내한 가이드가 계속해서 말했습니다.
“이 궁전은 1100년 동안 베네치아를 다스린 120명의 총독관저였습니다. 유일하게 남아 있는 베네치아의 권력과 영광의 상징입니다. 개축을 여러 차례 하고, 1442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 건물에는 고대 로마처럼 평의회, 원로원, 재판소, 무기고, 배의 설비 사무소 등을 보존하고 있습니다. 부정을 저지른 관료를 고발하는 편지함도 있습니다. 무고를 당하는 일이 없도록, 두 사람의 동의서가 함께 들어 있는 편지여야 고발이 받아들여졌다고 합니다.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하는 평의회 방에서 계단을 내려가면, 탄식의 다리를 건너 누베오 감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두칼레 궁전이 요술거울 대상에서 빠진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한다고, 가이드가 말하는 것처럼 들렸습니다.

두칼레 궁전을 나와서, 선착장으로 가는 동안에도 가이드의 설명은 이어졌습니다.
“어제 우리가 본 피렌체의 성공 신화는 메디치 가문의 금융업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이곳 베네치아의 성공 신화는 뛰어난 상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상술에 뛰어난 유대인들이 베네치아 번영의 일등공신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유럽 어디에도, 유대인들의 업적을 알리는 기록이 없습니다. 16세기 초까지, 베네치아 사람들은 유태인들에게 관대했다는 정도로 알려졌을 뿐입니다.”

유대인들이 베네치아 발전의 일등공신이었다는 말에, 호기심이 동한 나는 가이드 옆으로 다가갔습니다.
“유대인들은 적대 관계였던 아랍의 여러 나라와도 교역을 할 만큼 약삭빨랐다고 합니다. 13세기 초의, 제4차 십자군 원정은 교황 인노첸시오3세(1198~1216)의 요청에 따라 실행에 옮겨졌습니다. 하지만 십자군은 예루살렘으로 가지 않고,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습니다. 베네치아의 유대인들은 실속 없는 예루살렘 원정보다는, 경제적 이득을 노린 결과였다고 합니다. 이처럼 금융 자본을 거머쥔 유대인들 앞에서 로마교황도 쩔쩔매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베네치아 통치자들이 가톨릭과 손잡고 유대인 분리 정책을 강행하면서, 유대인 거주 지역 ‘게토’가 생겨났으며, 유대인들은 감시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기 무섭게, 내가 물었습니다.
“헤롯왕에 대해서도 말씀해주세요.”
뜬금없는 소리에, 가이드가 나를 쳐다보면서 아무 말도 하지 못했습니다.
대답을 듣자고 한 말이 아니므로, 나는 미소를 지으면서 어물쩍 넘어갔습니다.
베네치아 번영과 상술에 뛰어난 유대인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나의 뇌세포에 저장되었던 헤롯이 순간적으로 떠올랐습니다.

헤롯은 25세 무렵부터 갈릴리 지역의 세무관 업무를 보면서 자기사업도 같이했습니다. 갈릴리 북쪽의 ‘신의 삼나무 숲’이라고 알려진 울창한 자연림에서, 벌목한 백향목을 팔아서 큰돈을 벌었습니다.
자기 수입의 일정 금액을 관세로 로마에 납부했기 때문에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헤롯은 벌목에 만족하지 않고, 로도스 섬의 유리 제조업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양질의 원료가 풍부한 시돈과 티루스에 기술자들을 불러들여, 여러 가지 색깔을 동시에 집어넣는 대롱불기 신기술을 개발했습니다.
대롱불기로, 알록달록한 고가의 유리 제품을 대량 생산하여 팔았습니다.
이집트인들의 특산품 파피루스를, 두 뼘과 세 뼘 크기로 절단하여 20~30매씩 묶어서 팔았습니다. 두루마리 형태의 파피루스를 책으로 만든 최초의 아이디어 상품이었습니다.
배를 건조할 때 필요한 점성이 강한 역청도 사해의 갯벌에서 생산 판매했습니다.
이처럼 다양한 상품을 판매하기 위하여, 여러 척의 배를 가지고 있으면서 무역선단도 운영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지중해의 여러 항구에 토지와 건물을 소유하면서 헤롯은 자수성가한 전설적인 인물로 알려졌습니다.

그 무렵, 파르티아 원정에 나섰던 마크 안토니가 4개 군단을 이끌고 파르티아 접경 지역, 포이니키아에 갔을 때, 옥타비아누스를 죽이려다가 되레 쫓기는 신세가 된 풀비아로부터 빨리 집으로 와달라는 편지를 받고, 원정을 포기하고 로마로 갔습니다(BC40)
그런 일이 있고나서 얼마 후, 카이사르의 살인자 중에 한 사람이었던 카시우스가 시리아 총독으로 있으면서, 로마에 반역을 도모할 때, 유대인 안티고노스가 카시우스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예루살렘에 와서 헤롯의 형 바사엘을 살해했습니다.
안티고누스와 한 패였던 말라쿠스가 헤롯의 부친 안티파테르를 만찬에 초대 하고, 독이 든 음식을 먹여서 죽였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헤롯이 이두메로 달려갔으나 말라쿠스를 잡지 못하고, 예루살렘에 가서도 기다리고 있던 적의 공격을 받고 하마터면 죽을 뻔했습니다.

헤롯은 이집트의 마크 안토니를 찾아가서 자초지종 설명했습니다. 그러 다음, 원수를 갚도록 용병을 거느릴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부자로 알려진 헤롯의 청을 기다리기나 했던 것처럼, 마크 안토니가 허락하면서 유대 왕 칭호도 주었습니다.
자신의 참모, 니콜라우스에게 헤롯을 따라가서 도와주라고 했습니다(BC40).
헤롯은 갈릴리의 세포리에서 드라키아족, 가을족, 튜론족으로 편성된 3천의 용병을 모집하고, 갈릴리 지역에서 다윗 왕 후손을 자처하던 에제키아를 죽였습니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있을 때, 시리아 총독으로 가던, 소시우스가 예루살렘을 빼앗아 헤롯에게 주었습니다.

헤롯은 43세가 되던 해(BC37) 7월에 예루살렘을 접수했습니다.
그 후, 부자였던 헤롯은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예루살렘의 중심축을 이루고 있는 모리아 산과 오벨 산 새중간 구릉지의 낮은 곳에부터 거대한 석축을 쌓아올리고, 모리아 산의 흙으로 뒤채움을 하면서 성전 산을 조성했습니다. 이것 하나만 보더라도 헤롯은 진소위 영웅이었습니다.
성전 산이 조성된 다음, 사제들이 성전 본당 건물을 짓는 동안, 헤롯은 안토니요새를 지었습니다. 그리고 시온산 중턱에 하스모니아 궁전이 있는데도, 산 정상에 새 궁전을 짓고 건물 한 동을 바리새인들에게 주었습니다.
회당이 없었던 바리새인들은 시온 산 정상에서 모임을 가질 때마다 고함을 지르면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했습니다. 그들의 행태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 헤롯이 궁전 안으로 오게 해서 감시하자는 속셈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바리새인들은 헤롯 궁전을 마음대로 드나들면서 기고만장했습니다.
헤롯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이었습니다.
무역을 하면서, 옥타비아누스가 마크 안토니를 제거하려고 기회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그래서 자신의 용병을 사해 근처의 마사다 요새에 주둔시키고, 파르티아 침공에 대비한다는 명분을 내세웠습니다.
헤롯의 예상은 적중했습니다.
마크 안토니와 옥타비아누스가 악티움 해협에서 싸울 때(BC31), 헤롯은 어느 쪽 편도 들지 않고 무사히 넘길 수 있었습니다.
마크 안토니가 자살하고, 헤롯은 계속 용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지중해 동북쪽 보스포루스 해협의 폴레모 왕이 해적의 공격을 받고 도움을 청했을 때, 마르쿠스 아그립바와 함께 헤롯은 3천의 용병과 함께 참전해서 승리하고, 기원전17년 용병을 해산했습니다.
그 후, 헤롯은 키프로스 섬의 구리 광산 채굴권도 넘겨받았습니다.
헤롯은 예루살렘의 물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남쪽 베들레헴의 솔로몬 연못에서 예루살렘까지 수로 공사를 시작했습니다.
그 무렵, 헤롯이 노환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노골적으로 바리새인들이 도전해 왔습니다. 그 바람에 헤롯 궁전에서는 고성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헤롯은 호랑이 새끼를 키운 꼴이 되었습니다. 
더 이상 바리새인들과 함께 궁전에서 살 수 없게 된 헤롯이 여리고 성 별장으로 거처를 옮기고, 기원전4년 노환으로 죽었습니다.
헤롯의 사망 소식을 듣고,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구레뇨)가 달려와서 장례를 치르게 하고, 영토를 헤롯의 자식들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아겔라오(19세)에게는 예루살렘과 이두메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을, 안티바(16세)에게는 베레아와 갈릴리 지역을, 빌립에게는 드라고닛 주변과 갈릴리 호수 북동쪽 지역을 주었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유산 상속이었습니다.
어느 누구에게도 분봉 왕 따위의 특권을 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신약성경의 마태복음2장에는 얼토당토아니한 거짓말이 들어 있습니다.
‘헤롯 왕 때에 예수께서 유대 베들레헴에서 나시매, 동방으로부터 박사들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말하되 유대인의 왕으로 나신 이가 어디 계시뇨? 우리가 동방에서 그의 별을 보고 그에게 경배하러 왔노라 하니, 헤롯왕과 온 예루살렘이 듣고 소동한지라 왕이 모든 대제사장과 백성의 서기관들을 모아 그리스도가 어디서 나겠느뇨 물으니, 가로되 유대 베들레헴이오니 이는 선지자로 이렇게 기록된바 또 유대 땅 베들레헴아 너는 유대 고을 중에 가장 작지 아니하도다 네게서 한 다스리는 자가 나와서 내 백성 이스라엘의 목자가 되리라 하였음이니이다. 이에 헤롯이 가만히 박사들을 불러 별이 나타난 때를 자세히 묻고 베들레헴으로 보내며 이르되, 가서 아기에 대하여 자세히 알아보고 찾거든 내게 고하여, 나도 가서 그에게 경배하게 하라.’
이렇게 말하고, 박사들이 오지 않으니까 사람들을 보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헤롯은 진소위 영웅이었습니다.
영웅이 유아살해 같은 비열한 짓을 하겠습니까?
그러기 때문에 신약성경 자체가 ‘버니의 요술거울’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역사적 진실은 밝혀졌습니다.
더 이상 거짓말에 현혹되지 말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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