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신약성경과 우신예찬

                                            출처 / 네이버 / 베네치아

이번 여행을 통해서 나는 기대 이상의 성과를 올렸습니다.
르네상스 시절, 피렌체는 조각과 미술의 도시였습니다.
베네치아(베니스)는 상인과 문인의 도시였습니다.
밀라노는 정치인들의 무대였습니다.
르네상스 맹아가 언제부터 돋아나기 시작했을까?
이 문제를 놓고서도 고민했는데 … 말끔히 해결했습니다.

14세기 후반부터 16세기 전반까지를 르네상스 개화기로 봅니다.
근대 문명의 선구는, 르네상스였다는 여론이 지배적입니다.
그러나 르네상스 맹아는 고대부터 있어 왔다는 구체적 증거가 있습니다.
로마가 망하고, 봉건제도와 교회의 속박에 시달리던 <문명의 씨앗>이, 르네상스 개화기에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을 뿐입니다.
‘씨앗의 논리’와 ‘종의 기원’과 같은 진화론적 맥락에서 보면 이해가 됩니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입니다.
태생적 창조 정신이라는 유전인자를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씨앗의 형태로 얼마든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문명의 씨앗>이 생장 조건이 맞아떨어지면서, 예술 분야에서부터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르네상스입니다.
학문과 의술, 과학 전반에 걸친 탐구의 길이 열리면서 물질문명의 고도화 사회가 가능해졌습니다.
그 후, 과학과 종교는 근본에 엄연한 차이점이 있기 때문에, 양자택일이라는 막다른 코너로 사람들을 몰아넣고 있습니다.

피렌체에서 버스로 3시간 달려, 야심한 시각에 베네치아의 기차 종착역(산타 루치아) 인근 어느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다음 날, 선착장에서 수상버스(바포레또)에 승선했습니다.
가이드의 음성이 휴대용 단말기 이어폰을 통해서 들려왔습니다.

“베네치아는 섬이 많아서 선착장마다 고유번호가 있습니다. 1번은 산타 카아라, 2번은 산타 루치아, 15번은 산마르코, 20번은 리도 섬, … ”
오늘도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일정을 시작했습니다.
“베네치아는 알프스산맥과 이탈리아반도의 아펜니노산맥에서 발원한 포강의 하구에 있습니다. 강의 하구에는 모래와 흙이 쌓이기 마련이고, 아드리아 해에서 밀려드는 간만의 차이로 엄청나게 넓은 갯벌이 조성되었습니다. 5세기 중반 로마제국이 분열하면서 북동쪽 훈족의 침략으로 쫓김을 당한 사람들이 갯벌 한가운데 있는 토르첼로 섬에서 살았습니다. 인구가 점점 늘어나면서 6세기 말에는 레알토 섬을 비롯하여 12개 섬에 살면서 아드리아 바다와 지중해를 통해서 무역을 했습니다. 무역으로 많은 돈을 벌게 되자, 수심이 깊지 않는 바다에 말뚝을 총총히 박고, 석회암과 대리석을 채우면서 인공 섬을 만들었습니다. 점토질에 박힌 나무는 공기가 차단되면서 화석처럼 단단한 토대가 돼 주었고, 그 위에 항만 시설과 창고, 상점, 주택, 사무실 등 건물을 지었습니다. 이와 같은 작업이 근대까지 이어지면서, 베네치아는 본래 있던 섬과 인공 섬이 118개로 늘어났습니다. 섬을 연결하는 다리도 400여 개가 되고, 수많은 운하로 아름다운 물의 도시로 변했습니다. 지금 우리는 본섬에 있는 산마르코 선착장을 향해서 가고 있습니다.”

우리가 탄 수상버스는 산마르코 선착장까지 20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선착장에 도착하니까 곤돌라를 타려고 사람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곤돌라 사공은 검은색 바지와 줄무늬 셔츠를 입고, 빨강색 또는 파란색 띠를 두른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나는 곤돌라를 타지 않겠다고 말한 다음, ‘플로리안 카페’ 와 ‘메르체리에 거리’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습니다.
가이드는 산마르코 광장에 있는 카페와 르네상스 시절, 서점가로 유명했던 ‘메르체리에 거리’를 손으로 가리키면서 왜, 거기에 가려는지 알 것 같다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여행객 중에는 간혹 가다가, 그곳을 찾는 사람이 있다는 시늉을 해보였습니다.

피렌체에 천재화가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 빈치, 보티첼리가 있다면, 베네치아에는 편집자로서 천부적 재능을 타고난 마누치오(1119~1515)가 있습니다.
독일인 구텐베르크가 1440년대에 활판 인쇄술을 발명하고 나서 얼마 후, 마누치오가 기계를 이곳으로 가지고 와서, ‘알도출판사’를 설립했습니다.
그런 다음, 최고의 지식인을 발굴하면서 엄밀한 교정을 거쳐 훌륭한 책을 출판하면서 능력 있는 편집인으로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마누치오는 최초로, 책 읽는 즐거움을 독자에게 선물한 사람입니다.
독서가 공부를 위한 것, 또는 종교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여가 생활을 즐기기 위한 ‘취미’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었을 뿐만 아니라 지적인 욕망을 충족시켜준 사림이었습니다.
지식의 민주화, 지식의 세속화 새바람을 일으켰습니다.
마누치오는 유명인이기 때문에, 인터넷 검색을 하면 정보를 얻을 수 있습니다.

내가 찾는 ‘메르체리 거리’는 리알토 다리와 산마르코 광장 중간에 있었습니다.
기대했던 서점은 눈을 비집고 찾아도 없었습니다. 크고 작은 상점들의 진열대에는 이탈리아를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신발, 의상, 가방, 보석이 사람의 눈길을 끌었습니다.
F1(포뮬러원) 경주용 자동차를 전시해둔 붉은 페라리 매장 앞에서, 사람들이 감탄을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려고 온 것이 아니기 때문에 무심히 지나쳤습니다.
나는 그동안 글을 쓰면서, 이곳 풍경을 마음속으로 그려보곤 했기 때문에 또 다시 상상의 나래를 펼쳤습니다.
상점 진열대에는 신발, 의상, 가방, 보석 대신 ‘알도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으로 가득했습니다.
세계 최초의 악보집과 건축 화보집, 최초의 요리책, 게임 책, 역사학, 의학, 군사학, 지리학, 로마인들이 즐겨 보던 포르노 그림책 등이 거기에 있습니다.
그 중에는, 에라스뮈스(1466?~1536)가 ‘알도출판사’에서 1511년에 발행한 『우신예찬』,
1516년, 라틴어 신약성경을 다시 그리스어로 번역한 책도 있습니다.

가톨릭 신부였던 에라스뮈스는 자신이 편집해서 작성한 그리스어 성서를 다시, 기존의 라틴어 번역보다 더 정교한 라틴어 신약성경을 또 발행했습니다.
이처럼 개정과 증보판을 발행하면서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다음, 아이들의 조기 교육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어린이의 자발성과 개성을 존중한 『어린이의 교육에 대해서』를 1529년에 출간했습니다.
그가 쓴 많은 책 중에서, 나는 『우신예찬』을 높이 평가합니다.
그 책은 가톨릭교회에 대한 인문주의적 풍자였습니다.
1509년, 알프스산맥을 넘으면서 착상이 떠올랐다고 합니다.
『유토피아』의 저자 토머스 모어(1478~1535)의 집에서 열흘 동안 머물면서 장기를 두는 기분으로 썼다고 합니다.

우신은 바보의 신입니다. 바보의 신은 부유의 신을 아버지로, 청춘의 신을 어머니로, 도취와 무지의 두 유모 젖을 먹고 자랐습니다.
우신은 친구들을 여러 명 가지고 있었습니다. 추종의 신, 게으름의 신, 향락의 신, 무분별의 신, 방탕의 신, 미식과 수면의 신 등. 어리석은 신들을 통해서, 에라스뮈스는 당시 학자들의 어리석음을 통렬하게 풍자했습니다.
권위주의 및 형식주의로 떨어진 가톨릭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가했습니다.
"만일 교황이 기독교의 대리자라면, 그리스도처럼 불행한 생애를 보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러나 지금의 교황은 영화와 행복 속에 있다." 고 꼬집기도 했습니다.

그 무렵, 독일의 마틴 루터(1483~1546) 신부가 1517년 10월, 속죄의 효력에 관한 <95개 조문>을 발표하면서 종교개혁의 불씨가 되었습니다. 
1521년, 독일의 보름스에서 열린 신성 로마제국 의회에서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 운동을 단죄했습니다.
루터의 관할 영주 프리드리히 현제는 루터를 안전하게 보호하려고 바르트부르크 성으로 피신시켰습니다.
루터는 그곳에 머물면서, 에라스뮈스의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11주 만에 독일어로 번역했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독일어 성경을 출판한 것이 1522년 9월이었습니다.
루터는 에라스뮈스의 지지를 받으려고 여러 번 요청했으나, 에라스뮈스가 종교개혁에 동참하기를 거부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과격한 선동가였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이성과 의문을 발밑에 두고, 깔아뭉개야 한다.”
한 발 더 나아가, 성경의 내용이 의심스럽거나 다소 앞뒤가 맞지 않더라도 부정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신약성경 번역과 개정 증보판을 출간하면서 내용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던 에라스뮈스 입장에서 본다면 루터는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는 우신(바보)처럼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에라스뮈스는 1524년, 『자유의지를 혹평함에 대하여』를 발표하면서 루터에게,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귀하의 오만하고 무례하고 반골적인 본성으로 인해, 온 세상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귀하는 폭풍이 잠잠해지는 것을 저지하는 게 가장 큰 목적이라도 되는 듯이,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키기 전까지만 해도, 지구상에는 개신교가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종교개혁 이후, 유사 종교개혁자들 때문에 우후죽순 교파가 생겨났습니다.
루터는 르네상스 개화기에 나타나지 말았어야 할 불필요한 존재였습니다.
서기70년 유대를 파국으로 몰고 간, 종파분자의 망령을 불러들인 영매였습니다.
에라스뮈스의 말년도, 이성적 존재가 딜레마에 빠진 대표적 사례입니다.
그에게는 최상의 선택을 할 수 있는 여지가 있었습니다.
가톨릭과 개신교는 한통속이라서 선택 조건이 충족되지 않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버릴 수 있었는데 …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 때문에 타협, 관용, 사랑을 구현하려고 일생을 바쳤으면서도 개신교로부터 외면당하고, 가톨릭으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고 좌절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에라스뮈스는 양자택일이라는 막다른 코너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스위스 바젤에서 숨을 거둘 때 비감스럽기 짝이 없는 말을 남겼습니다.
“하느님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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