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빌라도 자살> 버전은 관광 홍보용 날조 기사

                                          출처 / 구글 / 스핑크스 전망대 

밀라노에서 4시간, 버스로 달려온 일행은 인터라켄의 어느 호텔에 투숙했습니다.
다음 날, 빙하와 만년설이 있는 융프라우(4,158m) 산 등정을 하기 위하여 기차역으로 갔습니다.
기차를 두 번 갈아탔습니다. 
간이역까지는 경사가 완만한 초원지대를 달리는 일반 열차였습니다.
톱니바퀴 열차로 환승하고, 곧바로 터널 속으로 들어갔습니다. 자연 경관을 해치지 않으려고 정상까지 터널을 뚫었다고 했습니다.
터널 경사도는 25%였고, 9.3km를 오르는데 50분이 걸렸습니다.
기업가이면서 엔지니어였던 ‘구에르 첼러’가 1896년에 시작해서 1912년 완공했으며, 폭약을 사용할 때마다 산이 훼손될 것을 우려해서, 소형 전동공구와 곡괭이, 날카로운 정으로 작업한 흔적이 터널 벽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열차 종착 지점 지하 동굴 홀에는, 공사에 참여 했던 인부들의 사진과 작업 당시의 화보가 걸려 있었습니다.
전망대를 오르는 가파른 실내 계단 앞에서, 산소 부족으로 구토와 어지럼 증세를 호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았습니다.
가이드가 멀미약을 주면서 건강이 좋지 않은 사람은 휴게실에서 안정을 취하라고 했습니다.
나는 어지럼증을 참아가면서, 쉬엄쉬엄 계단을 올라 스핑크스 전망대까지 갔습니다.
날씨가 쾌청해서 밖으로 나갔습니다.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알레치 빙하가 한 눈에 들어왔습니다. 알프스 산맥의 자연 경관은 감동의 파노라마였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빙하의 길이가 23.6km, 두께가 900m에 이르며, 알프스산맥에서 가장 크고 긴 빙하라고 했습니다.
톱니바퀴 열차로 올라오다가 잠시 정차했을 때, 우리는 얼음동굴과 얼음궁전으로 갔습니다. 그곳이 알레치 빙하 속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습니다.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에 등재된 이곳 빙하에서 녹은 물이, 레만호에서 론 강을 따라 지중해로 흘러간다는 사실을 안내 책자를 보고 알았습니다.
나는 한라산(1,950m)과 백두산(2,750m)을 관광차 다녀왔습니다.
그러나 유럽 알프스산맥의 융프라우 스핑크스 전망대(3,571m)까지 관광하리라고는 예전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한 사람의 기업가가 구상하고, 16년에 걸쳐서 완성한 터널 속으로, 톱니바퀴 열차가 관광객을 실어 나르면서 알레치 빙하 속의 얼음궁전을 보여주고, 전망대에서 빙하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만들었다는 것은 기적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시 톱니바퀴 열차를 타고 하산하면서, 나는 불현듯 소포클레스(BC496~BC406)의 희곡 『안티고네』 대사가 생각나서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경이로운 것이 허다하지만 인간보다 경이로운 것이 없구나. 강한 남풍에 밀리면서도 삼켜버릴 듯 사나운 물결을 헤치면서 흰 빛 바다를 건너가는 그 힘. 해마다 쟁기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말을 부려 땅을 파헤치니 최고의 신 불멸의 지칠 줄 모르는 대지의 신조차 인간에게 지쳐버린다. 경쾌한 조류, 사나운 야수, 심해의 어류조차 인간은 손수 짠 그물로 잡아 노획물로 끌고 간다. 인간 지혜의 탁월함이여!>

『안티고네』에 등장하는 오이디푸스는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푼 영웅입니다.
오이디푸스가 풀어야 할 수수께끼는, 모든 사람이 풀어야할 공통된 수수께끼였습니다.
‘당신은 누구이고, 운명 앞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를 통해서, 인간은 지혜로운 존재이며, 탁월한 인격의 소유자임을 강조했다고 봐야 합니다.
내가 이처럼 상념에 잠겼을 때, 가이드의 음성이 단말기 이어폰을 통해서 들여왔습니다.
“톱니바퀴 열차가 최초로 설치된 곳은 필라투스(빌라도) 산입니다.”
나는 또 다시 촉수를 뻗치면서 가이드를 주목했습니다.

“스위스 관광에는, 필라투스 코스와 융프라우 코스 두 곳이 있습니다. 융프라우 등산열차는 1912년에 완성된 것이고, 필라투스 톱니바퀴열차는 그보다 23년 앞선, 1889년부터 운행을 시작했습니다. 그곳의 경사도는 최대 48%입니다. 세계에서 가장 가파른 암벽 계곡을 톱니바퀴 열차가 올라갑니다. 총 연장 거리는 4,618m이고, 소요 시간은 30분입니다.”
필라투스 산(2,132m) 정상에는 호텔과 레스토랑과 교회도 있다면서, 하산할 때 등산철도 반대편의 케이블카를 이용하기 마련이라면서 가이드가 다시 말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126년 전, 어떻게 가파른 암벽에 톱니바퀴 등산열차를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곳 스위스 사람들의 억척과 지혜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가이드 말마따나 스위스 사람들의 억척과 지혜에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르네상스 이후, 물질문명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이 만들어 낸 기적이었습니다.

나는 2천여 년 전, 고대 로마인들이 문명의 씨앗을 움트게 한 사례를 몇 개 알고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문명인으로써의 자긍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인들도 시멘트로 건축물과 토목 구조물을 만들었습니다. 석회와 화산재, 그리고 물을 일정비율로 섞으면 접착력이 강한 모르타르(콘크리트)가 된다는 사실을 로마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모르타르를 가지고 똑 같은 크기의 벽돌을 대량 생산하고, 단단해진 벽돌을 일렬로 놓고 위에 모르타르를 놓고 다시 벽돌을 놓기를 반복하면서 벽체를 만들고, 벽체의 안과 밖을 다시 모르타르로 바르면 돌처럼 단단한 벽체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콘크리트 공법으로, 3~4층 인슐라(아파트)도 짓고 서민들은 거기서 살았습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코덱스 중에서, <인체 비례도>가 있습니다.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BC81~AD15)의 『건축 10서』에 있는 내용을 보고, 다빈치가 그림을 그렸습니다.
비트루비우스는 새나 벌의 둥지를 모방해야 주택이 편안한 휴식처가 된다면서 견고성과 유용성, 그리고 아름다움을 강조했습니다.
그 책 3장에 보면,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인체는 비례의 모범이다. 왜냐하면 팔과 다리를 뻗음으로서 완벽한 기하형태인 정방형과 원에 딱 들어맞기 때문이다.'
비트루비우스는 인슐라(아파트)와 같은 좁은 구조물을 지을 때, 사람이 활동할 수 있는 최소한의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면서, 인체의 비례 이야기를 했습니다.
비트루비우스는 이탈리아의 베로나에서 태어났습니다. 카이사르 휘하의 군단 건축기술자였습니다. 막사, 도로, 교량과 같은 공병업무의 책임자였습니다.
그가 쓴 『건축 10서』는 도시계획과 건축일반, 건축재료, 극장, 대중목욕탕, 운하, 항만의 설계를 비롯하여 측량과 건축 시공에 관련된 지식을 총망라한 로마 건축 문화의 금자탑이었습니다.
인슐라 1층에는 빵집, 푸줏간, 세탁소, 옷가게와 같은 점포가 있었습니다. 2층은 병원, 부동산, 사체업자, 용역업체, 심부름센터, 전당포, 변호사 사무실 등이 있었습니다.
3층부터 세입자들 주거용이었습니다. 인슐라 건물주들은 임대료를 받았습니다.
로마는 상, 하수도 시설을 완벽하게 갖춘 문화도시였습니다.
이탈리아반도의 등줄기에 해당하는 아펜니노 산맥에서 발원한 수원지에서 수로를 통해, 수돗물을 공급받아 생활용수로 썼습니다. 기원전312년에 아피나 수로가 최초로 만들어졌습니다.
아니오 수로(BC269), 마르키아 수로(BC140), 테풀라 수로(BC125)가 있었고, 측량 기술이 발달하면서 마르쿠스 아그립바가 만든 율리아 수로(BC33)는 아펜니노 산맥의 깊은 계곡에서 발원한 생수였기 때문에 수로의 길이가 길고, 수량이 풍부했으며 물맛이 좋기로 유명했습니다. 비르고 수로(BC19)와 알시에티나 수로(BC2)가 계속 만들어졌습니다.
이처럼 많은 수로가 있었기 때문에, 로마 시내에는 크고 작은 공공목욕탕이 줄잡아 170개가 있었습니다. 목욕탕에 딸린 세탁소, 이발소, 수면실, 와인가게, 레스토랑, 체육관도 있었습니다.
로마를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아피아 가도, 동북으로는 살라리아 가도, 서쪽으로는 플라미니아 가도, 동쪽으로는 노멘타나 가도, 투스쿨리나 가도를 비롯하여 또 다른 가도가 사방팔방으로 나 있었습니다.
고속도로에 해당하는 가도에는 말을 탄 병사가 반나절에 도달할 수 있는 지점마다 역참이 있었습니다. 역참에는 여관과 민간 운송업자들이 상주하면서 화물 운송과 여행객이 이용할 수 있는 정기 노선 역마차도 운영했습니다.
이처럼 로마에서는 문화생활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서기26년, 유대 속주로 오게 된 빌라도 총독은, 예루살렘에 도착해서 제일 먼저 시작한 업무가 헤롯왕이 말년에 중단한 수로를 다시 시작하는 토목공사였습니다.
예루살렘 남쪽 베들레헴의 솔로몬 연못물을 수로를 통해서 가지고 오려다가 헤롯이 사망하면서 중단 된 공사를, 다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총독이 공사를 빌미로 거액을 횡령한다는 구설수 때문에 공사를 중단했습니다.
이때부터 빌라도 총독은 유대인들을 나쁜 감정으로 대했습니다.
서기30년 유월절, 빌라도 총독은 유대 왕을 사칭 했다는 예수를 재판했습니다. 예수에게 죄가 없음이 밝혀졌는데도 예수에게 형벌을 선고하라고 했습니다. 총독은 가벼운 매질을 하고 방면하려고 생각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하더라도 사태의 심각성을 총독은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누군가가 유대 왕을 사칭한 자를 풀어주면, 당신은 카이사르 충신이 아니라면서 억지소리를 했습니다.
화가 난 총독이 감옥에 있던 흉악범 바라바를 대신 방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엄포용이었습니다.
그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렇게 하라면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화가 머리꼭대기까지 치밀어 오른 총독이 바라바를 방면했습니다.
백성의 안위를 책임져야 할 총독으로써는 적절치 못한 처사였습니다. 그러자 약점을 잡았다고 판단한 무리 중 누군가가 큰소리쳤습니다.
“유대 왕을 사칭한 자를 십자가에 처하시오.”
이때부터 광기와 집단 히스테리가 발동하면서 ‘십자가’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습니다.
축제 기간 중에 민란이 발생하면 안 된다는 생각에서, 총독은 마지못해 십자가처형을 지시하고, 하인이 떠온 물에 손을 씻으면서 말했습니다.
“이 사람의 피에 대해서 나는 무관하니 너희가 당하라.”
기고만장해진 무리 중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우리와 우리 자손이 책임질 것이요.”
이처럼 엄포를 놓으려다가 감정싸움으로 발전하게 된 결과에 대해서, 총독은 자괴감에 치를 떨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입고 있던 자주색 외투를 벗어서 예수의 어깨에 걸쳐주면서 말했습니다.
“이 시간부터 너는 내가 인정하는 유대 왕이다. 당당한 모습으로 가거라.”
그런 다음, 왕의 행차에 시종이 따라야 한다면서 두 명의 죄수를 함께 십자가에 매달게 했습니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아서, ‘나사렛 사람 유대인의 왕’ 이라고 쓴 팻말을 십자가 형틀 위에 매달게 했습니다.
총독은 해묵은 감정을 일시에 드러내면서 유대인들을 싸잡아 세상의 조롱거리로 만들려고 작심을 했습니다.
이것이 예수 사건의 전말입니다. 여기 어디에도 빌라도가 죄의식 때문에 괴로워했다는 식의 기사는 없습니다.
빌라도 총독은 10년 넘게 유대에 있다가 서기37년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로마로 돌아 온 빌라도는 한동안 이탈리아의 아브루초 주 테라모 현에 위치한 비센티라는 곳에서 살았습니다. 그곳에는 ‘필라투스의 저택’ 유적지가 있습니다.
서기43년,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브리타니아(영국) 원정을 하면서, 빌라도를 스위스 지역의 속주 총독으로 임명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루체른 주에 필라투스 산과 필라투스 마을이 있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든지 가설이 성립됩니다.
그곳에 있으면서 빌라도는 사망할 때까지 그곳 사람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고 봐야 합니다.
유대인들과 달리, 스위스 사람들은 빌라도의 업적을 높이 평가하면서 산과 마을 이름을 필라투스(빌라도)라고 명명했다고 보는 것이 상식적인 판단입니다.
필라투스 산과 가까운 슈탄스에, 고등훈련 비행기를 만들어서 외국에 수출하는 <필라투스 회사>가 있습니다. 비행기 만드는 회사 창업자가 상호를 만들 때 신중을 기했다고 봐야합니다.
필라투스 산과 관련된 이야기를 가이드가 얼마만큼 알고 있는지 궁금해서 물었습니다.
가이드의 대답은 기가 막힐 정도로 실망스러웠습니다.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도록 허락한 빌라도의 유령이 세상을 떠돌다가 필라투스 산 정상에 있는 호수에 머물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호수에서 용을 보았다는 사람들 이야기가 전해지면서 용의 모습이 필라투스 산 로고가 되었습니다. 16세기 경 가톨릭 성직자들이 호수를 메워버려서 지금은 유령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나는 쓴웃음을 짓고 말았습니다.
3~4세기경 가톨릭 교부 에우세비오(AD?~AD309)가 교회 전승을 기록한 교회사에, 가이우스 황제의 명령으로 빌라도가 자살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빌라도가 회개하고 그리스도인이 되어서 예수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다가 순교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집트의 콥트 교회와 에티오피아 정교회는 빌라도의 아내를 성녀로 받들고 있습니다.
가톨릭과 그리스 정교회, 그리고 개신교는 인정하지 않지만, 빌라도가 주교가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빌라도 보고서』라는 것도 있습니다. ‘빌라도의 진심 어린 고백서’ 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은 이 책은 새빨간 거짓임이 드러났습니다.
이러한 거짓말이야말로, 사람들을 술 취하게 하고 르네상스 이후 가톨릭이 정신문화의 발목을 잡고 있다는 명백한 증거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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