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루터의 터무니없는 주장은 무지와 오만의 소치

                                   출처 / 구글 /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

동시대 사람들은 사회적으로 비슷한 경험을 하기 때문에 가치관과 인생관을 비롯하여 문제의식에 있어서 유사성을 가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가톨릭 신부였던 에라스뮈스(1466?~1536)와 마틴 루터(1483~1546)는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 사람이었습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1452~1519)에 대한 견해도 생판 다르기 때문에, 3인3색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빈치는 르네상스 개화기에 결정적 공헌을 했습니다.
‘생각의 씨앗’ 코덱스를 그림과 설명을 곁들이면서, <인간의 잠재적 가능성>을 총체적으로 보여준 비범함과 총명함을 두루 갖춘 사람이었습니다.
물질문명 전 분야에 걸쳐서,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겼습니다.
다빈치는 탐욕스럽게 보일 정도로 새로운 것을 찾아 헤맸던 사람이었습니다.
건축, 토목, 수학, 과학, 해부학, 공학, 음악, 비행기, 자동차, 각종 무기, 탱크, 자동소총, 잠수복, 낙하산, 콘택트렌즈, 수력자명종 등 물질문명 전반에 걸쳐서 다양한 아이디와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습니다.
미술 분야에서 보여준 모험적 시도 역시 인상적이었습니다.
그 당시 성경 속 인물을 그릴 때, 당연히 넣어야 하는 머리 뒷부분의 후광을 다빈치는 넣지 않았습니다. 일반적인 배경에 인물을 넣어, 성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게 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의 경우, 가롯인 유다와 다른 제자들을 구별할 수 없게 했습니다. 이교도 신앙에서 영감을 얻어 그린 그림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자의적으로 그림을 그렸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 작품을 소개하는 여유도 보였습니다.
전쟁 무기 중에는, 독일의 기술자인 콘래드 카이저의 설계도면도 있습니다. 이탈리아 사람 마르티나가 설계한 자동차도 코덱스에 포함시켰습니다.
하지만 인체 해부도를 그릴 때만큼은 옆에서 보는 사람이 공포감을 느낄 정도로 세밀하게 그렸다고 합니다.
다빈치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남자와 여자의 시체를 30구 넘게 해부했습니다. 시체를 냉동시킬 방법도 방부제도 없던 시절이라서, 역겨운 냄새를 참아가면서 시체와 며칠씩 함께 보내면서 오장육부를 스케치했다고 합니다.
칼로 파헤쳐지고, 피부가 벗겨진 시체를 뚫어지게 들여다보고 있는 다빈치를 상상만 해도, 나는 끔찍해서 소름이 확 끼칩니다.
그렇게 해서 작성했다는 다빈치의 부검 기록을, 지식의 원전』(존 캐리편저/바다출판사)에서 읽었습니다.

<노인은 죽기 몇 시간 전에 나에게 말하기를, 자기 나이가 100살이며 전혀 아픈 데는 없고 단지 쇠약해져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리고는 (플로렌스의) 산타마리아 노벨라의 병원 침대에 앉아 아무 움직임이나 질병의 증상도 없이 죽음의 저편으로 떠나갔다. 이런 평화로운 죽음의 원인을 알아보기 위해 나는 노인의 시체를 부검했다. 그의 심장과 하부조직들이 완전히 쇠약해지고 수축되어 무기력한 상태인 것을 발견하였고, 인체 조직에 공급되는 혈액이 부족하여 쇠약해진 결과로 죽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살짜리 어린아이의 부검에서는, 이 노인의 경우와 완전히 반대되는 결과를 얻었다.>

남자의 성기, 자지에 대한 기록도 있습니다.
<그 녀석은 인간의 의지와 관련이 있는 것이지만, 가끔은 자기 자신의 의지를 드러내기도 한다. 남자들이 그것을 발기시키고 싶어도 완강히 거부하면서 늘어져 있기도 하고, 때로는 제 주인에게 의견을 물어보지도 않고 제멋대로 굴기도 한다. 가끔 남자들이 자고 있을 때 깨어나 있지를 않나, 써먹으려고 할 때 거부하거나 반대로 주인의 허락 없이도 활동을 하고 싶어 하질 않나, 이 녀석은 늘어져 있든 깨어나 있든 모든 게 자기 좋을 대로다. 이런 것을 보면, 이 피조물은 마치 인간과는 별도의 삶과 지능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남자들이 이 녀석의 이름을 부르거나 남에게 보여주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남자들은 이 녀석을 감추고 숨기려 들 것이 아니라, 오히려 미사에서 신부들이 나타나듯이 근엄하게 드러내놓아야 할 것이다.>

이 글을 베끼면서 한바탕 웃었습니다.
이처럼 다빈치는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대상을 연구했습니다.
실생활에 필요한 아이디어를 코덱스로 남겼습니다.
에라스뮈스가, 다빈치의 코덱스를 보았는지 나로서는 확인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나 에라스뮈스는 자기보다 14년 연상이었던 다빈치에게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습니다.
다빈치는 미래를 설계한 사람입니다.
에라스뮈스는 가톨릭교회의 개혁이 절실함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영성회복을 우선시하면서 신앙적 모험을 추구했던 사람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기초한 지고지순의 미덕을 다 함께 추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온건하고 합리적이며, 타협과 관용을 중시한 에라스뮈스는 다음과 같은 말도 했습니다.
"가장 행복한 사람은 학문이나 예술을 멀리 떠나, 자연을 주인으로 모시게 된 사람이다"
가톨릭을 『우신예찬』으로, 날카롭게 비평한 작가다운 발언이었습니다.
이처럼 뜻을 같이 하는 다빈치에게는 아낌없는 찬사를 보냈으면서도, 마틴 루터에게는 혹독하리만치 신랄한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나를 가슴 아프게 하는 것은, 귀하의 오만하고 무례하고 반골적인 본성으로 인해, 온 세상이 무장을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귀하는 … 모든 것을 뒤죽박죽으로 만들고 있습니다.”

에라스뮈스는 그리스어 신약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한 학자입니다. 신약성경에는 논쟁과 오해의 소지가 많다는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이 신약성경을 번역하지 못하게 하고, 화가들로 하여금 그림을 그리게 해서 신자들에게 보여주게 된 속사정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루터는 성경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영원불변의 진리인양 선전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터무니없는 억지 주장이었습니다.

바울의 서간문은 50~67년에 나왔습니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면서, 바울의 주장을 반박한 야고보서는 62~64년에 나왔습니다.
사도행전은 62~63년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예수의 신화’에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첨가한 마가복음은 65~70년에 나왔습니다.
예수의 탄생설화와 부활에 대한 세부 내용이 윤문 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85~90년에 나왔습니다. 요한복음은 80~90년경, 요한계시록은 95년경에 나왔습니다.
바울의 서간문 이외의 문서는, 신원미상의 작가들이 썼습니다. 서기70년 유대를 파국으로 몰고 갔던 종파분자들 주장이고, 역사적으로 검증할 수 없는 날조 기사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에라스뮈스가 이와 같은 사실을 모를 리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루터는 억지소리를 했습니다.
성경의 내용이 다소 앞뒤가 맞지 않고 의심스럽더라도 부정하지 말고, 무조건 믿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믿음으로 모든 이성과 의문을 발밑에 두고, 깔아뭉개야 한다.”
이 무슨 뚱딴지같은 소립니까?
도대체 무슨 근거로 그 따위 막말을 합니까? 
세상 사람들을 무시해도 유분수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습니까?
그래서 에라스뮈스는 루터에게 ‘귀하의 오만하고 무례하고 반골적인 본성으로 인해, 온 세상이 무장을 하고 있다.’면서 개탄스러워했습니다.

루터는 종교개혁의 주창자로 일약 스타가 되었습니다.
교황청과 가톨릭교회는 부패한 생활 때문에 적자에 허덕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교황 레오 10세는 베드로(산피에트로) 대성당을 건축하려고 면죄부를 팔았습니다.
“누구든지 회개하고 기부금을 내면 죄를 용서받을 수 있다. 돈이 이 상자 속에 짤랑하고 들어가는 순간, 영혼은 지옥의 불길 속에서 튀어나오게 된다.”
면죄부를 사면, 성모 마리아를 범한 죄라도 용서받을 수 있다고 말할 정도였습니다.
마틴 루터는 독일의 비텐베르크 교회의 정문에 라틴어로 된 <95개조 의견서>를 내걸었습니다(1517).
일종의 항의문이었고, 교회 정문에 붙인 대자보였습니다. 
이것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독일 국경을 넘어 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이것을 두고, 종교개혁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종교개혁이 아니었습니다. 가톨릭 2중대가 하나 생겼을 뿐입니다.
에라스뮈스 말마따나, 루터로 말미암아 오만하고 무례하고 반골적인 본성으로 무장한 2중대, 3중재가 계속 생겨났습니다.
르네상스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던 가톨릭으로써는 홍위병이 생긴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두고 보자는 식으로 나왔습니다.
내가 이처럼 다빈치와 에라스뮈스 그리고 루터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는 동안에도 밀라노 관광을 마치고 다음 관광지 인터라켄을 향해서 버스는 고속도로를 일정한 속도로 달리고 있었습니다.

갑자기 버스가 정차했습니다. 
이탈리아와 스위스 국경 검문초소였습니다. 세관 검사나 입국 심사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로마에서 만난 현지가이드는 밀라노에서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인천공항부터 우리와 동행한 인솔가이드가 차내 방송으로 말했습니다.

“우리가 탄 버스는 조금 있으면 고트하르트 터널 속으로 들어갑니다. 이 터널은 스위스 북부 도시 바젤과 남부 도시 키아소를 연결하는 고속도로(A2)의 일부이고, 왕복 2차선입니다. 길이는 16.942㎞입니다. 제한 속도는 시속80㎞이고, 터널 안에서의 차간 거리는 150m 이상입니다. 1969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1980년 9월에 개통했습니다.”  

고트하르트 터널이라는 말에, 그 유명한 ‘고트하르트 고개’가 떠올랐습니다.
이 터널이 뚫리기 전, 예전 사람들은 험준한 알프스 산맥을 ‘고트하르트 고개’로 넘었습니다.
서기1800년, 나폴레옹은 중무장 병력을 이끌고 해발 2,106m 고트하르트 고개를 넘어 이탈리아 북부까지 왔습니다. 서기43년에는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브리타니아(영국) 원정을 하려고 4개 군단과 함께 이 고개를 넘었습니다.
기원전55년과 54년, 카이사르가 두 차례 군대를 이끌고 고트하르트 고개를 넘었습니다.
기원전218년, 카르타고의 한니발도 4만의 병력을 이끌고 지중해 서쪽 이스파니아에서 피레네산맥을 넘고, 갈리아를 거쳐서 고트하르트 고개를 넘어 로마인들의 뒤통수를 치면서 남쪽으로 내려갔었습니다.
내가 이처럼 뜬금없는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가이드가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터널과 가까운 곳에, 새 터널을 만들고 있습니다.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은 1996년에 착공하여, 공사 중입니다. 2016년 개통 예정이라고 합니다. 터널의 길이가 57㎞여서, 세계에서 가장 긴 철도터널이 될 거라고 합니다.”

나폴레옹과 고대 로마인들, 그리고 한니발이 고생고생하면서 넘은 알프스 산맥을, 우리는 버스로 몇 십 분 만에 통과했습니다.
참으로 편리하고, 살기 좋은 세상이라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고트하르트 베이스 터널’이 완성되면 더 빨리 알프스산맥을 통과할 수 있다고 하니까, 문명의 씨앗을 키운 르네상스 선구자들을 다시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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