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가톨릭의 계책으로 정신적 불구가 된 르네상스

                                                출처 / 구글 / 최후의 만찬

“역사는 진정 정신문화의 종말을 고하고, 물질문명의 흥성을 도모하고 있는 것인가.”
『토지』작가 박경리가 세상을 향해서 묻고 있습니다.
참다운 삶에 대한 탐구와 끊임없는 도전정신이 잘 드러난 외침이기도 합니다.

나는 밀라노에 와서, 가톨릭의 절묘한 계책으로 정신적 불구가 된 르네상스의 실상을 파악했습니다.
가톨릭은 서기392년 신구약 성경을 확정 짓고도, 일반 신도들에게 보여주지 않고 ‘사도신경’만 외우게 했습니다.
알렉산드리아의 교부 제롬(346~420)이 번역한 불가타 라틴어 성경이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에라스뮈스가 1516년 그리스어 성경을 가지고 라틴어 신약성경을 다시 번역했습니다.
마틴 루터는 이단자로 몰려 생명이 위태로울 때, 독일 동부에 위치한 작센의 통치자 프리드리히1세의 보호를 받으면서 바르트부르크 성에서 1522년 독일어 신약성경을 출판했습니다.
영국에서는 존 위클리프(1324~1384)가 라틴어로 된 신약성경을 영어로 번역하면서 가톨릭을 비판하다가 노환으로 죽었습니다. 1415년 콘스탄츠 공의회에서 위클리프를 이단으로 단죄하면서 그의 유골과 저서를 함께 불태웠습니다.
존 위클리프로부터 영향을 받은 윌리엄 틴들(1484~1536)도 영국에서 독일로 건너가, 기존에 없던 단어들을 만들면서 1526년 영어 신약성경을 발행한 죄로, 체포되어 네덜란드에서 1536년 화형을 당했습니다.
이처럼 가톨릭은 성경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번역자들을 죽이면서까지 유포되는 것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가톨릭은 성경이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했을까요?
거기에는 말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로마황제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 발표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톨릭은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에 대한 맹목적인 신앙만 공유하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의 명분이나 존립의 타당한 근거를 제시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서기70년 젤롯당원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면서 성전은 잿더미로 변해버렸습니다.
그 자리에, 서기691년부터 무슬림의 사원 <바위 돔>이 들어섰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가톨릭은 구심점이 없는, 요사스럽고 건전하지 못한 사교 집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부랴사랴 만든 것이 성경입니다. 구약성경만 가지고는 유대교와 차별화할 수 없기 때문에, 바울의 서간문과 종파분자들이 만든 문서 중에서 몇 개를 선별하여 신약성경으로 편집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의 서간문 외의 다른 문서들은 출처불명에 신원미상의 작가들 작품이라서,
* 예수의 사도로 추정되는 이들과 관련이 있어 보이는 문서,
* 성령의 영감을 받아 쓰였다고 믿을 수 있는 문서,
* 그것들과 모순되지 않는 다른 문서,
* 믿음과 직제가 통합된 가톨릭교회에서 사용하기에 적합한 문서(27권)를 골라서 구약과 함께 신약을 확정지었습니다.(AD392)
신약에 들지 못한 문서로는 도마복음, 니고데모복음, 바돌로매복음, 베드로복음, 마리아복음, 야고보복음, 빌립복음, 요셉복음, 맛디아복음, 또 다른 마태복음, 나사렛인복음, 히브리인복음, 애급인복음, 바울행전, 요한행전, 안드레행전, 도마행전, 베드로행전, 바나바행전, 빌립행전, 빌라도행전, 야고보행전, 다대오행전, 사도서신, 고린도3서, 라오디게아서, 그리스도와 압갈서신, 바나바서신, 바울과 세네카서신, 베드로묵시, 바울묵시, 야고보묵시, 도마묵시, 스데반계시록 등등이 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신약성경은 논쟁과 오해의 소지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신약성경이 있다는 사실만 알리고, 내용을 공개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그 대신, 사도신경을 암송하라고 했습니다.
사도신경은 가톨릭, 성공회, 개신교가 조금씩 다릅니다.
개신교의 사도신경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 이는 성령으로 잉태하사 동정녀 마리아에게 나시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장사한지 사흘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시며, 하늘에 오르사,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저리로서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성령을 믿사오며, 거룩한 공회와, 성도가 서로 교통하는 것과, 죄를 사하여 주시는 것과,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옵나이다. 아멘.>

사도신경은 신앙의 근본적 핵심 원리를 정리한 신앙 고백이기 때문에 이것만 외우면 다른 것은 알 필요가 없다는 식으로 가르쳤습니다.
사도신경을 가톨릭의 기도문으로 활용하기 시작한 것은 4세기 무렵부터였습니다.
5세기경 현재와 같은 형태로 되었다가 10세기경 지금과 같은 완결된 형태가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가톨릭은 비난과 공격을 여러 번 받았습니다.
집정관과 속주 총독을 역임한 켈수스가 성경을 거론하면서, <예수는 자신의 거룩한 사명을 확신하지도 않았고, 성경의 기적 사건들은 허구적인 이야기이고, 설사 그런 것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이집트인들의 주술적 전승들을 수용한 것일 뿐>이라는 취지의 글을 발표했습니다.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AD355~415)도 <십자가상에서 죽은 누군가가 부활하여 구세주가 되었다는 미덥지 못한 이야기를 진리처럼 가르치는 건 끔찍한 일이다.> 말했습니다.
서기622년, 아랍인 무함마드가 메카로부터 메다니로 이주해 와서 그리스도 부활을 선전하는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보이다가, 기독교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고 돌아갔습니다.
그런 다음, 바울이 그리스도교를 창시한 것처럼, 유대교의 유일사상과 구약을 기반으로, 이슬람교를 창시했습니다.
신약성경은 아예 빼버리고, 히라 산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면서 『코란』도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언제 또 다시 무함마드 같은 사람이 나타나서, 유사 종교를 만들지 모르는 일이라서, 신약성경을 공개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랍니다.

십자군 원정도 따지고 보면 명분 쌓기였습니다. 가톨릭교회와 봉건왕조가 손을 잡고 176년 동안(1096~1272), 8차례에 걸쳐 원정을 시도했다가 번번이 실패했습니다.
원정에는 실패했지만, 무역을 통해서 동방의 진귀한 물품이 베네치아, 제노바, 피사와 같은 항구도시에 들어왔습니다.
그러나 십자군 원정으로 금전적 손실과 엄청난 액수의 빚을 지게 된 가톨릭의 정치적 통합 체제가 허물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와는 달리, 르네상스 맹아가 싹트기 시작하면서 사물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인식이 바뀌고 사람마다의 태생적 창조 정신이 작동하기 시작했습니다.
가톨릭도 발 빠르게 대응했습니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화가들로 하여금 성경의 주요 사건들을 명화로 그리게 했습니다.

<최후의 만찬>을 가지고 한 번 생각해 볼까요?
5세기 무렵부터 화가들이 그림으로 표현하기 시작되었습니다.
여러 사람들이 둘러앉은 테이블에는 빵과 물고기 또는 가나의 혼인 잔치와 같은 암시적 물건, 포도주가 놓여 있었습니다.
그 그림이, 르네상스 시대에 와서는 드라마적 감동과 재미를 결합한 최후의 만찬 각본으로 바뀌면서, 대사와 강력한 메시지가 있는 그림이 되었습니다.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그런데 이 드라마틱한 각본은 고린도전서11장에도 있습니다.
바울이 서기55~56년에 고린도 사람들에게 보낸 편지였습니다.
서기30년 예수사건 당시, 바울은 20세였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소아시아의 남동쪽에 위치한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난 디아스포라 유대인입니다.
그리스 문화의 교육을 받고, 로마시민권을 가졌으며, 예루살렘에 와서는 바리새파 최고지도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업을 이수했습니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스데반 사건 때였습니다.
스데반이 대제사장 앞에서,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 하다가 성난 백성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을 때,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바울(사울)에게 자신의 옷을 벗어 던지면서 두고 보자는 식 감정 표현을 했습니다.
스데반 사건 이후,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을 척결하려고, 40인의 랍비 특공대가 조직되었습니다. 바울이 바리새인들의 신뢰를 회복하려고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습니다.
시리아로 도망간 이단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겠다면서 바울이 랍비 특공대의 일원으로 따라가다가, 시리아의 다메섹 도상에서 환영을 보고,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을 믿는 무리의 사도가 되었다는 자전적 이야기가 사도행전9장에 있습니다.
바울은 예수가 살아생전, 무슨 말을 했는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젊은이다운 패기로, 기독교를 창시해서 로마의 종교박람회장에 출품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두 번씩이나 로마로 가다가, 클라우디우스 황제가 로마 거주 유대인들을 이주 시킨다는 말을 듣고, 로마행을 포기한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최후의 만찬>은, 허구성을 가미한 그럴듯한 스토리였습니다.

예수는 유월절이 되기 3일 전에, 예루살렘에 왔습니다.
예비일이 시작되기 일몰 직전, 예수는 베다니 사람들을 따라 어느 다락방에 갔다가 그곳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비밀 집회인줄 알고, 급히 감람산으로 피신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예수가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모임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것처럼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서기65~70년에 나온 마가복음이 차용했습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 (14;22~26)
서기85~90년에 나온 마태복음(26;26~30)과 누가복음도 차용했습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않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느니라. … (누가복음22;14~20)
그러나 80~90년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요한복음 13장에는 떡과 포도주 이야기는 들어 있지 않습니다.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아 제자들 발을 씻기시고 … ’
이처럼 신약성경을 보면, <최후의 만찬>은 허구성을 가미한 그럴듯한 스토리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합니다.
그러나 신약성경을 모르고 화가들의 그림을 보면, 이야기는 달라집니다.
성스럽고 장엄한 감동을 받기에 충분합니다.
가톨릭은 바로 이 점을 노리고, 또 다른 천박한 지성을 명화로 그리게 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종교적 감동과 종교 외에는 다른 세계를 생각할 수 없도록 시도하고 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정신적 불구의 르네상스를 만들려는 지능적 음모입니다.

나는 밀라노에 와서, 또 다른 사례를 발견했습니다.
십자군 원정의 실패로 가톨릭은 궁지에 몰렸는데도 교황 클레멘스5세는 사치스런 생활과 파벌 근성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그러다가 유럽의 주도권을 장악한 프랑스 왕 필리프4세에게 아비뇽으로 유배당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1309년부터 77년까지 가톨릭은 남프랑스의 아비뇽에 있다가, 그레고리오11세의 로마 귀환으로 유배가 끝났습니다.
그 무렵,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국제 교류와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상인과 토지소유 계층이 가톨릭과 봉건왕조에 맞서서 독자적인 세력을 형성했습니다.
북부 이탈리아의 페라라, 포를리, 만토바, 베로나, 파도바, 라벤나, 리미니와 같은 도시에서는 시민연대 코무네의 전권을 넘겨받은 시뇨리아(참주) 체제가 확고해졌습니다.
시뇨리아는 자신들의 권력을 종신직으로 만들고 싶어 했습니다.
돈으로 참주가 된 자들도 있었습니다.
용병대장 조반니 아쿠토는 영국인이면서도 피렌체에서 이름을 날렸고, 프란체스코 스포르자는 용병 대장이었으면서도 밀라노의 참주가 되었습니다.
참주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하여 유럽의 지배권을 되찾은 가톨릭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서임을 받으려고 했습니다.
가톨릭은 참주들 요구를 들러주면서, 도시마다 두오모(성당)을 중심으로 시가지를 만들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가이드 말마따나, 이탈리아에서는 두오모 관광을 빼면, 
여행이 이뤄지질 않을 정도가 되면서, 르네상스는 정신적 불구가 되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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