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밀라노에서 다시 만난 카이사르와 키케로

                                                 출처 / 구글 / 밀라노 

버스가 밀라노에 도착하니까 오후 1시30분이었습니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늦은 점심을 먹고 가이드의 안내로 밀라노 광장으로 갔습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두오모(성전) 관광을 빼면 여행이 이뤄지질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보고 게시는 밀라노 대성당은 600년 동안 차곡차곡 지어진 건물입니다. 1386년부터 시작해서, 1965년 완공되었습니다. 축구 경기장의 1.5배 넓이로 바티칸의 베드로 성당과 스페인의 세비야 성당 다음으로 큰 성당입니다.”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바라 본 성당 건물은 웅장하고 엄숙하고 광대한 분위기를 연출하려고 외벽에는 수많은 조각품으로 채워져 있었습니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총 3,159개의 뾰족뾰족한 조상 중에서 2,245개가 건물 외벽을 장식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하늘을 찌르는 135개의 지붕 탑 정상에는 성인들 조상이 바늘처럼 서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눈부시게 빛나는 것이 하나 있었다. 밀라노의 수호신, 성모 마리아 조상이었습니다.
그 조상에는 3,900장의 금박을 입혔다고 합니다. 그 말을 들으니까, 웅장하고 엄숙하다는 느낌은 온데간데없고 한심하고 유치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가이드에게 스포르체스코 성, 그러니까 필리포 비스콘티(1392~1447) 가문의 궁전이 어느 쪽에 있는가 물었습니다. 일정표에 들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위치만이라도 알고 싶어서 물었습니다.
스포르체스코 성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브라만테가 참여해서 제작된 밀라노의 대표적인 르네상스 건축물입니다. 그 건물이 관광 코스에 들지 않은 것이 못내 아쉬웠습니다.
가이드는 여기서는 보이지 않는다면서 방향만 가리켰습니다.

나는 베네치아에서 밀라노까지 오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고대 로마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롬바르디아 평원은 거센 역사의 격랑 그 자체였습니다. 시대가 바뀔 때마다 치열한 전투가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피렌체와 베네치아 두 도시가 동맹을 맺고, 밀라노와 10년(1423~1433) 동안 롬바르디아 평원에서 싸웠다는 역사적 기록에 주목했습니다.
근대 문명의 선구는 르네상스였다는 여론이 지배적입니다. 그런데 유독 피렌체와 밀라노는 르네상스 맹아(씨앗)를, 고대 로마에서 찾으려고 했습니다.
피렌체의 서기장 살루타티(1331~1406)는 키케로(BC106~BC43)의 서간문을 도입하고, 로마의 공화정이야말로 인간의 가능성이 크게 열린 시대였다면서, ‘카이사르와 같은 독재자가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빼앗았다.’ 주장하면서 공화정을 권장했습니다.
그러나 밀라노는 완전히 딴판이었습니다.

혼란스러웠던 공화정 말기, 카이사르(BC100~BC44)는 새바람을 일으킨 유일무이한 천재 통치자였음을 상기하면서, 자신들의 지도자 필리포 비스콘티(1392~1447)를 카이사르에 버금가는 위대한 인물이라고 선전했습니다.
기원전44년 3월15일, 원로원 의원들이 마련한 환송 연회장에서, 암살범들이 카이사르를 살해할 당시, 키케로는 숨어서 보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와 키케로는 <문명의 씨앗>을 놓고 싸웠습니다. 자기 쪽 사람들이 씨앗을 파종했는데, 다른 쪽 사람들이 짓밟았다면서 이념적 논쟁을 했습니다. 카이사르가 암살당한 것도 그 때문이었습니다.
이러한 이념적 대결은 수세기 동안 잠잠하다가, 중세 유럽의 피렌체와 밀라노 사람들에 의하여 재현되었습니다. 제2, 제3의 카이사르와 키케로가 격렬하게 싸웠습니다.
인류 문화사에 있어서, <문명의 씨앗> 존재 여부는, <신을 믿고 안 믿고> 만큼이나 예민하고 중요한 사안입니다.
급조된 건축물은 기초가 부실하기 마련입니다. 뿌리를 땅 속 깊이 내리지 못하면 나무는 폭우를 견디지 못합니다.
어찌되었건 간에, 근대 문명의 선구는 르네상스였다는 여론이 지배적인 가운데, 인문주의(르네상스) 맹아를 고대 로마에서 찾으려는 시도가 있었다면, 그것 하나만으로도 고무적이고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나는 일찍이, 근대 문명의 선구자들이 있었다고 확신합니다. 르네상스 개화는 결코 우연의 산물이 아니라고 믿고 있습니다.
그래서 근대 문명의 선구자를 찾아 나섰습니다.
마침내 여러 선구자를 찾았습니다.
선구자 중에서 한 사람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사람은 태생적 창조 정신을 가진다. 자력갱생의 정신력으로 새사람이 될 수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이론적 가설입니다.
심증이 가는데 물증이 없으면 이론적 가설을 가지고 논쟁을 시작합니다.
가설로부터 이론이 도출되고, 관찰이나 실험을 통해서 타당성이 입증되면 진리가 됩니다.
내가 심혈을 쏟은 『몸젠과 기번의 틈새 로마사』는 그렇게 만들어졌습니다.
카이사르도 내가 찾은 선구자 중에 한 사람이었습니다.
혼란스러웠던 공화정 말기에 새바람을 일으킨 천재 통치자였습니다.
카이사르의 천재성에 대해서 말한 사람이 또 있습니다.
에드워드 기번(1737~1794)과 테오도어 몸젠입니다.
기번이 쓴 『로마제국쇠망사』는 서기98년 트라야누스 황제부터, 1453년 콘스탄티노플의 멸망까지 1300년 동안의 로마역사를 다룬 것으로, 여러 <로마사> 중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계몽적이라는 평가를 받았습니다.
기번은 로마제국의 멸망 요인으로, 야만족의 침입을 우선시 했습니다. 그 다음으로 가톨릭을 받아들였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로마제국쇠망사』 발간 이후, 기번은 종교적 불경이라는 비난을 받았습니다. 신의 존재를 인정하면서도 시종일관 기독교가 전파됨에 따라 발생한 폐해를 집중적으로 서술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번이 죽고, 80년 이후 태어난 몸젠의 『로마사』는 기원전 8세기경부터 기원전 44년 카이사르 사망까지의 역사를, 신화로 바라보던 기존의 시각에서 벗어나, 고대 로마인의 삶과 로마의 흥망성쇠를 실증적으로 연구했다는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고전으로 불리는 책입니다.
몸젠(1817~1903)은 카이사르에 대해서, ‘로마가 낳은 유일한 창조적 천재’라고 높이 평가했습니다.

카이사르에 대해서 높이 평가한 사람이, 고대 로마에서도 있었습니다.
기원전27년부터 아우구스투스 황제 사망(AD14)까지의 41년 기간 중에 활동했던 역사가 리비우스(BC59~AD17)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기원전44년에 살해당했습니다. 그 당시 19세였던 옥타비아누스는 기원전27년, 종교적인 의미를 지닌 아우구스투스(존엄자), 임페라토르(황제), 프린켑스(제1인자) 칭호를 원로원으로부터 받았습니다.
카이사르 사망부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칭호를 받기 전까지의 17년은 원로원이 갈피를 잡지 못하고 허둥대던 시절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카이사르 암살에 만족하지 못하고 키케로는 카이사르의 부관이었던 마크 안토니도 제거하려고 죽기 전까지 탄핵 언설을 열네 번이나 했습니다.
그것 때문에 기원전43년, 키케로는 소속을 알 수 없는 병사들에게 살해당했을 때, 마크 안토니가 보낸 병사들에게 살해당한 것처럼 알려졌습니다.
그러나 마크 안토니는 카이사르의 유지를 따르려고, 암살범들에게 관용과 포용 정신을 몸소 실천한 사람입니다.
파르티아에 포로로 잡혀 있는 만여 명에 달하는 로마군을 구출하려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가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는 로마에 있었습니다. 옥타비아누스를 따르는 병사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옥타비아누스가 병사들을 보내, 키케로를 살해할 수도 있었습니다.
이처럼 카이사르와 키케로가 연이어 죽었기 때문에, <문명의 씨앗>은 더 이상 사회적 이슈가 될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다가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였으면서도 <문명의 씨앗>에 대해서 추호의 미련도 없는 한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문명 창출과 공존을 전제로, 미래를 내다 본 진정한 통치자였습니다. 키케로는 공화정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탈피하지 못한 병든 지식인이었습니다.
카이사르는 승자와 패자가 없는, 모두가 하나의 로마로 결속될 수 있는 방법으로, 관용과 포용 정신을 이야기 했습니다. 키케로는 막무가내로 카이사르 제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카이사르가 죽고 선도적 역할을 할 수 없게 된 로마인들은 도약의 기회를 살리지 못하고 퇴행의 수순을 밟기 시작했습니다.
첫 번째 주자로 나선이가 아우구스투스 황제였습니다.
출신성분이 의심스러운 마이케나스와 호라티우스, 그리고 황후 리비아 세 사람의 농간에 놀아나면서, 아우구스투스 황제는 로마제국을 종교박람회장이 되게 했습니다. 은밀한 미스터리와 허망지설이 창궐하게 만들었습니다.
이를 보고 개탄을 금치 못한 사람이 역사가 리비우스였습니다.
리비우스는 자신이 만든 연대기, 그러니까 에트루리아의 7대 왕이 추방되고, 공화정이 시작되던 해(BC509)를 원년으로, 『도시의 건설로부터』를 저술 중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리비우스가 생각하는 원년보다 244년이나 거슬려 올라가서,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건국신화와 트로이 장군 아에네이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하고, 로마를 건국한 신화를 넣고 다시 쓰라고 했습니다.
리비우스의 『도시의 건설로부터』 142권 중에서, 아에네이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하면서 시작하는 1권은 계획에도 없었습니다.

갈리아인의 로마 약탈(2~5권),
삼니움과의 전쟁(6~10권),
이탈리아 반도의 정복(11~15권),
포에니 1차 전쟁(16~20권),
포에니 2차 전쟁(21~30권),
마케도니아와 페르세우스 전쟁(31~45권),
동맹시 전쟁(46~70권),
내란과 마리우스 죽음(71~80권),
내란과 술라의 죽음(81~90권),
폼페이우스의 개선(91~103권),
공화정 말기(104~108권),
내란과 카이사르 암살(109권~116권),
악티움 해전(117~133),
드루수스의 사망(134~142권).

이처럼 142권까지 썼을 때,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로마인들과는 아무런 관련도 없는 트로이 장군 아에네이스가 이탈리아에 도착해서, 로마를 건국한 것처럼 신화를 1권에 집어넣으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도시의 건설로부터』는 엉망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리비우스는 집필 목적을 서문에서 밝혔습니다.
세계를 지배하게 된 역사적 사실을 부각시키고, 로마를 위대하게 이끌어온 사람들의 생활방식과 내란을 초래하게 된 퇴폐적인 분위기를 알려,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높이는데 있다고 명확히 제시했습니다.
그런데 1권에 신화를 집어넣게 되면, 본래의 취지가 무색해지면서 거짓말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저술 의욕을 잃고 말았습니다.
드루수스 사망 이후(BC9)의 역사를 더 이상 쓰지 않았습니다.
게르만족과 싸우던 로마군 17, 18, 19군단이 토이토부르크 숲에서 참패를 당하고, 사령관 바루스가 현지에서 자살한 사건(AD9)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티베리우스가 설욕전에 나섰다가 실패하고, 후임 사령관 게르마니쿠스가 적에게 빼앗겼던 두 개의 군단 깃발을 되찾았는데도(AD16) 『도시의 건설로부터』에 넣지 않았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사망 이후, 3년이나 더 살았으면서도 황제의 행적을 한 줄도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생뚱맞은 내용을 9권에 집어넣어, 논란의 여지를 남겼습니다.

“만약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이탈리아로 쳐들어와서 로마와 싸웠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도시의 건설에 앞서 일어난 전설들, 또는 그것이 건설된 것은 역사가의 확실한 기록보다 시인의 창조로 꾸며지는 것이 더욱 적합하다.”

리비우스는 신화를 1권에 집어넣게 해서, 자신의 역사서를 한낱 픽션으로 만들어버린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시인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런데도 이와 같은 내막을 알 턱이 없는 사람들은, 리비우스의 가상 역사서 운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리비우스가 쓴 『도시의 건설로부터』는 근본 취지가 무색해졌습니다. 주제가 애매모호한 미완의 작품이 되고 말았습니다. 리비우스는 베네치아 서쪽 파타비움(파도바) 고향에서 75세에 사망했습니다.
그런데 리비우스를 공화주의자였다고 주장하면서 책을 발행한 사람이 있습니다.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1469년 피렌체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가 많은 장서를 소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독서에 관심이 많았다고 합니다.
마키아벨리는 리비우스의 역사서, 『도시의 건설로부터』1~10권을 읽고, 『로마사 논고』 논평을 썼습니다.
1913~19년에 작성된 이 논평은 로마 공화정이 위대한 제국을 건설하는 데 성공한 원인을 밝히기 위해 『도시의 건설로부터』를 읽고, 면밀히 분석한 것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면밀히 분석한 사람이 어떻게, 리비우스가 겪은 심적 고통을 발견하지 못했을까요?
『도시의 건설로부터』는 원본에 누락분이 많다고 합니다. 모순적이며 지루하고 장황한 부분도 있다고 합니다.
리비우스의 작품인지, 의심이 가는 부분도 있다고 합니다. 신화와 전설과 실제 사건이 뒤죽박죽이라서 번역에 애를 먹었다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를 시인이라고 추켜세우면서 비아냥거린 부분이 있고, ‘만약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 하면서 역사서로는 부적절한 표현도 있다고 학자들이 말했습니다.
이처럼 허점투성인 데다가 미완의 작품을 가지고, 마키아벨리는 원로원의 공화정이 위대한 정치체제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까요?
그런데다가 『로마사 논고』를 바탕으로 『군주론』도 썼습니다.
『군주론』의 핵심은 다음과 같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상황에서 모든 일을 이성적인 대화만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일 뿐이다. 분명 폭력은 짐승에게나 어울릴 수단이지만, 군주는 때때로 짐승이 되어야 한다. 곧 사자의 힘과 여우의 간교함을 갖추어야 한다. 한 번의 단호한 폭력으로 더 많은 폭력과 혼란을 잠재울 수 있다면 군주는 당연히 짐승의 수단을 택해야 한다.>
또 이런 말도 했습니다.

<군주 된 자는, 특히 새롭게 군주의 자리에 오른 자는, 나라를 지키는 일에 곧이곧대로 미덕을 지키기는 어려움을 명심해야 한다. 나라를 지키려면 때로는 배신도 해야 하고, 때로는 잔인해져야 한다. 인간성을 포기해야 할 때도, 신앙심조차 잠시 잊어버려야 할 때도 있다. 그러므로 군주에게는 운명과 상황이 달라지면 그에 맞게 적절히 달라지는 임기응변이 필요하다. 할 수 있다면 착해져라. 하지만 필요할 때는 주저 없이 사악해져라. 군주에게 가장 중요한 일이 무엇인가? 나라를 지키고 번영시키는 일이다. 일단 그렇게만 하면, 그렇게 하기 위해 무슨 짓을 했든 칭송 받게 되며, 위대한 군주로 추앙 받게 된다.>

아무리 생각해도, 독재자에게나 어울리는 말입니다.
카이사르는 승자와 패자가 없는, 모두가 하나의 로마로 결속될 수 있는 방법으로, 관용과 포용 정신을 이야기 했습니다.
마크 안토니도 카이사르 암살범들에게 관용과 포용 정신을 베풀면서 첫 번째 수혜자가 되게 했습니다.
그런데도 키케로는 카이사르와 마크 안토니를 정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키케로와 마키아벨리는 이탈리아에서 번성했던 자치공동체 ‘코무네’의 전권을 넘겨받은 시뇨리아(참주)들에게나 필요한 카리스마적 존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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