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로마를 숙주삼아, 강성해진 가톨릭

                                                출처 / 구글 / 예루살렘

서기70년 유대가 파국을 맞았을 때, 예루살렘 성전은 젤롯당원들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거대한 휘장에 불을 지르고 도망가면서 성전은 소실되었습니다.
이것으로, 성전 무용론을 주장하던 무리의 헛된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도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로부터 은혜를 입었으면서도 배은망덕하게도, 로마 총독이 유대인들에게 박해를 가했으며,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가 수백 만 명의 유대인을 죽였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했습니다.
또 다른 거짓말도 했습니다.
서기73년 4월, 사해 근처의 마사다 요새에서, 유대인 남자, 여자, 어린이를 포함해서 960명이 로마 병사들에게 무참히 살해되었다고 했습니다.
마사다 요새는 강대국 파르티아의 공격에 대비하려고, 헤롯이 만든 요새였습니다. 그런데도 유대인들이 로마에 결사항쟁 하다가 장열하게 전사한 유적지로 세상에 알려지면서, 관광 차원에서의 홍보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에게는 변변한 무기도 없었습니다. 지략이 출중한 지휘관이나 군수물자를 계속해서 공급할 수 있는 경제력도 없었습니다. 단도를 몸에 숨기고 다니다가 찌르고 도망하는 시카리당원이나, 일시적인 무뢰배들의 난동을 가지고, 로마와 유대 전쟁이라는 터무니없는 허구적 이론으로 날조한 거짓말을 유포시켰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주적은 파르티아였습니다.
서기114년 이후, 파르티아는 시도 때도 없이 국경선을 넘어 쳐들어오면서 말썽을 피웠습니다. 트라야누스 황제가 서기117년, 자신의 양자였던 하드리아누스를 시리아의 총독으로 임명하고 파르티아와 싸우라고 했습니다.
파르티아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습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121~180) 황제 시절에도 반격에 나섰던 1개 로마군단이 궤멸당하고, 사령관이었던 카파도키아 총독 세베리아누스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자결했습니다.
파르티아와 국경분쟁으로 어수선할 때, 부친의 뒤를 이어 제위에 오른 하드리아누스가 가뜩이나 파르티아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을 때 유대인들이 말썽을 피우니까, 서기135년 예루살렘에 와서 유대인들을 쫓아내고, 도시 명칭을 ‘아엘리아 카피톨리나’로 바꾸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유대인들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그 후, 로마의 설린 왕국 아르메니아가 파르티아에게 점령당하기 직전, 전세를 역전시킨 사령관은 아비디우스 카시우스(?~175)였습니다.
카시우스는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 방위 군단을 이끌고 파르티아 군을 격파한 다음, 아르메니아 왕국의 수도 아르타크사타를 탈환했습니다(AD163).
서기165년에도 유프라테스 강 건너편까지 진격하고, 166년에는 티그리스 강 너머 파르티아의 심장부 깊숙이 쳐들어갔다가 철수했기 때문에 파르티아는 더 이상 로마와 싸우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파르티아 전쟁에서 승리한 카시우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가서, 그리스와 유대인들의 고질적인 분쟁도 무력으로 잠재웠습니다.
이처럼 파르티아 문제를 해결하니까 서기169년에는 이탈리아 북쪽의 게르마니아가 폭동을 일으켰습니다. 폭동을 진압하니까, 이번에는 속주 총독들이 말썽을 피웠습니다.
판노니아 총독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시리아총독 페르켄니우스 니게르, 브리타니아 총독 클로디우스 알비누스가 제각각 황제를 사칭했습니다.
최종적으로 판노니아 총독 세베루스가 권력투쟁에서 승리하고 로마제국의 20번째 황제가 되었습니다.
이후, 세베루스가 병사하고,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세배루스가 235년에 죽으니까, 사령관들이 황제를 사칭하면서 50년간 무려 26명의 황제가 즉위했다가 대다수 황제들은 자신의 병사들 손에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중에서도 21년 동안 집권할 수 있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로마를 둘로 나누고, 거기에 부제까지 두면서 사분통치를 시작했습니다.
부제의 아들이었던 콘스탄티누스와 역시 부제의 아들이었던 막센티우스가 로마의 밀비오 다리에서 싸우고, 콘스탄티누스가 승리하면서 사분통치도 끝이 났습니다.

이처럼 정적을 물리친 콘스탄티누스가 갑자기 가톨릭을 공인한다고 발표했을 때, 거기에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었습니다.
지중해 전역에서 잡초처럼 무성하게 자란 기독교(가톨릭)를 제압할 어떤 대안도 콘스탄티누스는 갖고 있지 않았습니다.
가톨릭과의 싸우게 된다면 무력으로 승리할 수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가톨릭과 손을 잡으면 여러 가지로 유익하다는 사실을 콘스탄티누스는 알고 있었습니다.
가톨릭은 자고이래로, 총대주교 체제였습니다. 대 도시마다 총대주교가 있었습니다.
수도 로마에는 교황에 해당하는 총대주교가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콘스탄티노플리스,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에티오피아, 카르타고, 베네치아, 등등, 인도에도 총대주교가 있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허용할 수밖에 없었던 속사정은 이 때문이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가 기독교를 공인하고 나서 얼마 후, 지중해 일대의 총대주교 대표들이 터키 북서쪽에 있는 니케아에서 제1차 공의회를 열었습니다(AD325).
그 후, 장소를 바꿔가면서 공의회를 소집하면서 결속력을 과시했습니다.
공의회의 기원은, 초대교회부터 사도회의를 가졌던 데서 비롯되었다는, 기록을 봐서도 알 수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서기330년,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로 옮겼습니다. 천도를 하고 나서도 91년 동안은 여전히 하나의 로마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모친 헬레나는 65세가 되어서야 세례를 받았다고 합니다. 세례를 받고 예루살렘에 갔을 때, 예루살렘 총대주교로부터 그리스, 라틴, 아람어 문자로 된 '나사렛 예수, 유대인의 왕'이라는 나무판대기를 선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 나무판대기는 서기30년 빌라도 총독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게 하고, 유대인들을 조롱하기 위하여 만든 팻말일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베들레헴의 어느 마구간에 가서는 감격한 나머지 예수 ‘탄생교회’를 세웠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예수의 발자국이 남아 있는 올리브 산에, ‘승천교회’도 세웠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헬레나의 소소한 행적이야말로,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이 어떻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는지, 파악할 수 있는 단초가 됩니다.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은 이와 같은 치졸한 방법으로 권력의 중심부에 파고들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수도를 천도함으로써, 로마가 분열할 수밖에 없는 여건을 만들었습니다. 로마의 총대주교(고황)가 급성장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마련해주었습니다.
콘스탄티누스는 잦은 정략결혼으로 가족관계가 복잡했습니다. 세 아들과 두 조카에게, 부제의 지위를 주어 통치를 분담시켰습니다. 그 때문에 콘스탄티누스가 죽은 후,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 비극이 연출되면서 로마는 또 다시 사분오열로 이어졌습니다. 
테오도시우스1세(379-395) 황제가 죽은 후, 큰아들 아르카디우스가 동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되었습니다. 둘째 아들 호노리우스는 서기421년부터 서로마를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테오도시우스1세의 딸, 리키니아 에우독시아는 서로마 황제 발렌티니아누스3세와 결혼하고, 서기440년경 예루살렘을 다녀왔습니다.
에우독시아는 베드로가 예루살렘 감옥에 있을 때 묶었던 쇠사슬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것을 베드로가 로마의 마메르티노 감옥에 있을 때 묶였던 쇠사슬과 함께 보관하니까 기적적으로 붙으면서 한 개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을 신주단지처럼 보신 곳이 ‘바티칸시국’입니다.
서기476년 게르만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가 로마를 점령했습니다. 오도아케르는 스스로 황제라 칭하지는 않았지만 황제와 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사신을 보내, 동로마의 종주권을 인정하였으므로 동로마 황제 제노도 어쩔 수 없이 오도아케르에게 총독의 칭호를 내리고 서로마의 지배를 묵인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제노 황제가 동고트족 테오토릭 왕에게, 오도아케르 토벌을 부탁하면서, 서기493년 서로마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이탈리아 왕국이 세워졌습니다.
이처럼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도 로마의 총대주교(교황)는 빠르게 기반을 다져나갔습니다. 그러나 다른 지역 총대주교는 가톨릭을 비판하는 사람들 때문에 시끌시끌했습니다.

* 안티오키아 총대주교의 신학자 오리게네스 말년이었던 220~250년 무렵, 집정관과 속주 통독을 역임한 켈수스가 240개 항목의 글을 암브로시우스를 통해서, 오리게네스에게 토론을 제의한 적이 있었습니다.
『참된 가르침』의 저자였던 켈수스에 대한 기록은 극히 일부만 남아 있습니다.
두 사람의 토론은 1846년 야크만에 의해 편집되었고, 1873년에 카임이라는 학자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켈수스가 어떤 입장이었는지를 역 추적하면서 만들어진 다섯 문항 요약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기독교 진리는 보편적 철학에서도 능히 발견할 수 있다.
둘째, 예수는 자신의 거룩한 사명을 확신하지도 않았고, 성경의 기적 사건들은 허구적인 이야기이고, 설사 그런 것들이 있었다고 해도 그것은 이집트인들의 주술적 전승들을 수용한 것일 뿐이다.
셋째, 기독교인들은 그들 자신 안에서도 결속을 이루지 못하고 있으며, 그 안에는 수많은 섹트(분파)와 차이점이 있고, 기독교인들은 지혜와 선도 없고, 무지하며, 죄인들이라고 했습니다.
넷째, 역사의 관점에서 기독교를 비판했습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은 고유한 것이 아니라 그리스 철학의 플라톤, 헤라클리투스, 소크라테스 그리고 다른 철학자들에게서 차용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섯째, 기독교가 이 세상의 모든 것들을 주관하려는 헛된 희망을 버리고, 사회와 분리된 삶을 포기하고, 제국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말과 믿음과 행동을 보여야 한다고 했습니다.

* 알렉산드리아의 총대주교에서도 가톨릭을 비판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여성 수학자 히파티아(AD355~415)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십자가상에서 죽은 누군가가 부활하여 구세주가 되었다는 미덥지 못한 이야기를 진리처럼 가르치는 건 끔찍한 일이다.”
히파티아는 총대주교 키릴로스가 사주한 불한당들에게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

* 에티오피아 총대주교에서도 괄목할만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리스도 부활을 선전하는 유대인들이 아라비아 반도의 서쪽에 있는 메다니에서 촌락을 이루면서 살고 있었습니다.
서기622년, 무함마드(570~632)가 메카로부터 메다니로 이주해 왔습니다.
무함마드가 그리스도 부활을 선전하는 유대인들에게 관심을 보이자, 유대인들은 열성적으로 그에게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하지만 메다니에 살고 있던 유대인 사이의 갈등이 깊어지면서 서로 무함마드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했습니다.
무함마드는 어느 편에도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바울이 그리스도교를 창시한 것처럼, 무함마드도 유대교의 유일사상과 구약을 기반으로 이슬람교를 창시했습니다.
신약은 아예 빼버렸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유대인들과 무함마드는 사이가 멀어지면서 원수지간이 되었습니다.

무함마드는 서기610년, 메카 근교의 히라 산 동굴에서 천사 가브리엘을 통해, 유일신 알라의 계시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그가 사망할 때까지 받은 계시를 집대성한 것이 『코란』입니다.
『코란』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혀 죽지도, 사흘 만에 부활하지도 않았으며 이슬람 속에서 위대한 성자로서 생을 마감한 사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슬람에서 모세와 예수는 무함마드와 대등한 존재입니다.
무함마드는 이슬람교를 전도하기 위하여, ‘한 손에는 칼, 다른 손에는 코란’을 들고 공격적으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무함마드에게는 여러 명의 부인이 있었고, 62세에 죽었습니다.
갑작스러운 죽음에 대해서 여러 설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이름을 알 수 없는 어느 부인이, 남편은 독약을 먹어도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이라는 말에, 진짜 독약을 먹여서 죽었다는 이야기가 지배적입니다.

무함마드가 죽고 6년이 지난 해, 무슬림들은 예루살렘을 정복했습니다(AD638),
그리고 유대교의 성전이 있던 자리에, 자신들의 사원을 지었습니다(AD691).
무슬림의 사원 <바위 돔>은, 현대에 와서도 여전히 무슬림의 위용을 과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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