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예루살렘 성전 최후의 날

                                             출처 / 구글 / 예루살렘 

서기70년, 예루살렘 멸망은 유대인들의 자멸적 행위였다고 앞에서 설명한바 있습니다.
로마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무능했던 네로 황제는 서기68년 6월9일 자살했습니다. 그가 죽기 하루 전이었던 6월8일, 원로원은 이스파니아 총독 갈바를 황제로 추대했습니다. 갈바가 제위에 오르고 나서 6개월이 되던 69년 1월15일, 갈바가 오토에게 살해당했습니다.
갈바를 살해하고 제위에 오른 오토는 4월15일, 롬바르디아 평원에서 자기가 보낸 군대가 싸움에서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살했습니다.
오토 다음으로 황제가 된 비텔리우스는 제위 8개월이 되는 12월22일, 롬바르디아 평원에서 자기 쪽 병사들이 수세에 몰리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짐과 동시에, 호위 병사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이처럼 네로가 자살하고 17개월 사이에, 세 사람의 황제가 죽었습니다.
그 기간에, 티투스는 시리아에 있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무키아누스의 승전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예루살렘에서의 종파분자들 소요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요세푸스가 쓴 『유대전쟁사』제3권 초입에 보면, 터무니없는 날조 기사가 있습니다.

“로마군은 요세푸스의 공격에 화가 치밀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들은 평지의 마을들을 방화하고 들판에 있는 가축들을 잡아가는가 하면, 전쟁 능력이 있는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약한 자들을 잡아갔다. 이에 전 갈릴리 지역은 온통 피바다와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갈릴리에서는 저질러지지 않은 불행과 비극이 없을 정도로 온갖 불행과 비극이 만연했다. 그리하여 갈릴리 인들이 피할 피신처라고는 요세푸스가 성벽을 쌓아 요새화한 도시들밖에 없었다.”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계속됩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가다라에 입성하자마자 젊은이들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모조리 학살하였다. 로마인들은 유대국에 원한을 품고 있었고, 특히 케스티우스(칼루스)의 참패로 인한 적개심이 불타고 있었기 때문에 연령에 관계없이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이것으로도 부족해서, 티투스가 예루살렘을 공격하면서 유대인을 백만 명이나 죽인 몹시 우악스럽고 사나운 침략자였다고 『유대전쟁사』에 썼습니다.
이처럼 엉터리 기록을 남긴 요세푸스야말로 얼굴빛 하나 안변하고 멀쩡하게 거짓말하는 천부적인 사기꾼이었다고 봐야 합니다.
요세푸스 외에도, 사기꾼이 또 있었습니다.
85~90년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태복음2장에 보면, 진소위 영웅에 해당하는 헤롯을 사악한 왕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 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라. … 헤롯이 죽은 후, 주의 사자가 애급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 오니라. 그러나 아겔라오가 그 부친 헤롯에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러라.’

헤롯이 사망한 기원전4년에는 아겔라오가 19세였습니다. 예루살렘과 이두메 그리고 사마리아 지역을 상속 받았습니다.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는 헤롯의 장례를 치르게 하고, 유산을 분배하고, 인구조사를 실시했습니다.
세금징수 청부업자들에게 인두세 환산 자료를 주기 위해서였습니다.
그 자료를 가지고 업자들은 경쟁 입찰을 통해서 인두세를 선납하고 세리들로 하여금 인두세를 거두어들였습니다.
퀴리니우스는 이처럼, 헤롯 이후의 공백 기간을 직접 챙겼습니다. 그런 다음, 아겔라오가 29세가 되던 서기6년, 정식으로 유대 왕이 되게 하려고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보냈습니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 말타케 소생 아겔라오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유대인들이 대표단을 먼저 보내, 아겔라오를 모함했습니다.

“아겔라오는 포악한 자입니다. 헤롯이 죽으니까, 다윗 왕 후손을 자처하면서 갈릴리에서 왕 행세를 하던 유다란 자가 있었습니다. 사령관 바루스가 그 자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이고 로마로 갔습니다(AD4). 그런데도 아겔라오는 유다의 자식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요량으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무뢰배들을 갈릴리로 보내,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했습니다. 그 바람에 아이를 빼앗긴 여인들이 머리와 가슴을 풀어헤치고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이처럼 원성이 높아지니까, 황제께서 그와 같은 지시를 내린 것처럼 둘러댔습니다. … ”

때마침, 게르마니아 원정을 준비 중이던 바루스가 아겔라오를 전쟁터로 데리고 갔습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된 퀴리니우스는 코포니우스를 첫 번째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거짓 유아살해 탄원서를 보낸 것이 괘씸해서, 대제사장 예복을 빼앗아 안토니요새의 로마 병사들에게 보관하라고 지시했습니다.
그 후, 대화해일 하루만 예복을 사용하고, 반납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대제사장을 비롯하여 사제들 위신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대제사장 예복은 서기37년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귀국한 다음, 시리아 총독 비텔리우스가 유월절에 와서 돌려주었습니다.
이처럼 거짓 유아살해 탄원서와 대제사장 예복을 빼앗아 안토니요새에 보관하도록 지시한 퀴리니우스는 로마에 가서, 서기21년 노환으로 죽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죽고, 서기14년 제위에 오른 티베리우스가 로마제국에 대한 공헌이 컸다면서 국장으로 극진히 대접했습니다.
퀴리니우스의 업적을 티베리우스가 어떻게 알았을까요?
로마의 사령관과 총독은 업무일지를 보고하도록 제도가 갖추어져 있었습니다.
회계감사관, 법무관, 안찰관을 비롯하여 여러 부서가 있으며, 문서보관소도 있었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역사가이면서 유대에 관심이 많았던 클라우디우스는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고 봐야 합니다.
그런데다가 같은 시대의 크고 작은 사건은, 유기적 구성력을 갖습니다. 누가, 언제, 어디에서, 무엇을, 어떻게, 왜를 적용하면 사건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를 놓고 보면,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단번에 알 수 있습니다.
요세푸스는 베스파시아누스로부터 은혜를 받았습니다.
로마시민권, 연금, 토지 등을 하사받고 편안하게 노후를 보내면서 75년부터 79년 사이에 로마에 있으면서 『유대전쟁사』를 썼습니다.
유대고대사』는 95년경에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두 책을 각기 다른 문자로 썼습니다.
66~70년의 유대반란을 기록한 『유대전쟁사』는 팔레스타인 지방 사투리, 아람어로 썼습니다. 『유대고대사』는 라틴어로 썼습니다.
왜, 다른 문자로 썼을까요?
여기에는, 교활하고 지능적인 속임수가 있습니다.
로마인들은 아람어를 모릅니다. 그래서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를 나쁜 통치자였다면서 지독한 거짓말, 구라를 쳤습니다.
그런데다가 바리새파의 랍비였던 요세푸스는 사두개파와 종파분자들에게 억하심정을 품고 있었습니다.
서기41년, 아그립바가 클라우디우스 황제로부터 유대 왕 칭호를 받고 예루살렘에 와서, 대관식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 지지 세력이 없었던 아그립바로써는 무모한 짓이었습니다.
아그립바가 유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사제들이 음모를 꾸몄습니다.
청색 실에 금패가 달린 성관을 쓰고, 세마포의 겉옷에 긴 앞치마처럼 생긴 에봇을 어깨에 걸치고, 푸른색 초록색 진홍색의 가는 베실로 짠 띠를 다시 매고, 가슴에 12지파를 상징하는 각종 보석의 흉패가 붙은 예복을 입고, 대제사장이 아그립바에게 가서 두루마리를 읽으라고 했다.
히브리어로 된 신명기였습니다.
아그립바가 더듬더듬 읽기 시작했습니다.

“네가 야훼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 ….”

아그립바는 이두메 출신 후손이기 때문에 왕이 될 수 없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구경꾼들이 야유를 보냈습니다.
아그립바가 낭패를 당해 쩔쩔매고 있을 때, 바리새파의 최고 지도자 가말리엘이 단상에 뛰어올라가서 아그립바의 손을 힘차게 붙잡고 말했습니다.
“걱정하지 마시오. 아그립바! 당신은 우리의 형제요. 아무렴! 우리의 형제이지.”
그렇게 말하고는 아그립바의 호위무사를 자처했습니다.
그 후, 바리새인들이 국정을 좌지우지 했습니다.
그러나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서기44년, 아그립바가 클라우디우스 황제 생일을 축하기 위하여 마련한 연극 공연장에서, 누군가가 준 음료수를 마시고 죽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바리새인들은 수세에 몰리면서, 정적들로부터 생명의 위험을 느낀 나머지 모두 지방으로 도망갔습니다.
그러나 사두개파의 사제들은 다른 종파분자들과 싸우면서, 끝까지 예루살렘에 남아 있었습니다.
지방을 전전하던 바리새인들 중에서 이름이 후대에 알려진 사람은, ‘요하난 벤 자카이’ 입니다. ‘벤’은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자카이는 요세푸스와 마찬가지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찾아가서 율법학교를 설립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그 학교가 오늘날에는, 유대인들이 자랑하는 교육의 요람으로 알려지면서 자카이는 유대인들로부터 추앙을 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요세푸스는 배신자, 변절자 소리를 듣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유대전쟁사』를 통해서, 서기70년 예루살렘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서기54년 성전 봉헌식을 하려다가 성전 무용론을 주장하는 폭도들 공격을 받고 취소된 사건이 있었습니다.
62년에는 대제사장 안나스2세가 호전적 무리들에게 살해당했습니다.
64년에는 인두세 반대자들이 세리들을 위협하는 바람에 세금징수 청부업자들이 입찰에 응하지 않았고, 플로루스 총독이 산헤드린에게 대납을 요구했습니다.
성전금고에서 17달란트 거금을 지불한 산헤드린에서는 총독이 강제로 빼앗아갔다고 둘러대면서 책임 회피를 했습니다.
화가 난 총독이 안토니요새 로마 병사들을 가이사랴로 이동시키면서 예루살렘은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예루살렘 시가지까지 책임지게 된 성전 경비대장 엘루아살이 혈기왕성한 젊은 사제들을 규합하여, 늙은 대제사장 맛디아스를 성전에서 몰아내고, 성전 번제단에서 매일 조석으로 올리는 ‘황제의 만수무강을 기원하는 제사’를 중단시켰습니다.
유대북부지역에 있던, 아그립바2세가 달려와서 제사를 중단하면 선전 포고나 마찬가지라면서 제사를 계속해야 한다고 설득했지만, 되레 생명의 위험을 느끼고 도망치다시피 돌아갔습니다.
엘루아살이 기스칼라에서 명성을 날리던 폭도 우두머리 요한을 예루살렘으로 불러들였습니다.
예루살렘에 와서, 요한은 개선장군처럼 위세를 떨었습니다. 
성전을 제집 드나들듯 하려고 했습니다. 그 꼴을 못마땅하게 생각한 엘루아살은 요한을 불러들인 것을 후해했습니다.
서기54년의 폭도들 공격 이후, 사제의 뜰과 백성의 뜰 담장을 높고 견고하게 쌓고, 청동으로 된 니카노르 문도 세웠습니다. 엘루아살이 안에서 걸어 잠그고 요한이 본당 건물에 들어오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렇게 되니까 엘루아살과 젤롯당원들은 꼼짝없이 갇힌 신세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하 비밀통로가 있어서, 지내기에는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성전 출입을 할 수 없게 된 대제사장 맛디아스는 마사다 요새에 세 아들을 보내, 바오라의 아들 시몬(시카리당)을 오라고 했습니다.
시몬도 예루살렘에 와서, 개선장군인 양 위세를 떨면서 시가지에 철공소를 차려 놓고 칼과 창을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미천한 농부의 아들 예수가 철공소 앞에 서서, ‘화 있을진저 예루살렘아!’ 하면서 늘 하던 말을 되풀이 하다가 매를 맞았습니다.
시카리당원들이 헤롯궁전의 재산을 약탈하니까, 아그립바2세의 동생 베레니케가 식솔들을 거느리고 야심한 시각에 예루살렘을 빠져나갔습니다.
예루살렘은 세 무리가 나누어 가진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성전 경비대장 엘루아살은 사제의 뜰과 본당 건물을, 기스칼라 요한은 안토니요새와 이방인 뜰, 시카리당 시몬은 시온 산과 시가지를 차지했습니다.
시몬의 참모였던 므나헴이 헤롯궁전에 들어가서, 왕관과 의상을 입고 왕 행세를 했습니다. 그 자는 다윗 왕 후손을 자처하던 에제키아의 후손이고, 갈릴리 유다의 조카였습니다.
그가 왕 행세를 하면서 거들먹거리니까 동료들이 죽였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이런 일이 있을 무렵, 베스파시아누스는 로마의 원로원으로부터 서기69년 12월20일, 황제로 추대를 받았는데도 가지 않고 알렉산드리아에 있었습니다.
열 달 동안 이집트에 있으면서 바닥난 황실 재정 복구에 주력했습니다.
베스파시아누스가 서기70년 8월 초순, 로마를 향해 출발했습니다.
시리아에 있던 티투스도 로마로 가려다가, 아그립바2세로부터 예루살렘 소요를 진정시키고 가라는 부탁을 받고, 예루살렘으로 왔습니다.
티투스 병사들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니까, 대제사장 맛디아스가 성을 빠져나가 세 아들이 시몬과 함께 엘루아살과 요한을 제거하기 위하여 일을 꾸미고 있는 중이라면서 기다려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맛디아스의 말과는 달리, 시몬이 안에서 성문을 닫고, 맛디아스의 세 아들을 성벽 위에 세우고 소리쳤습니다.
“맛디아스! 사악한 로마의 개들에게 자식들을 살려달라고 애원해 보거라.”
그러면서 한 사람씩 성벽 밑으로 떨어트려 죽였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있던 티투스가 공격 명령을 내렸습니다.
투석기에서 쏘아올린 돌이 성안으로 날라들었습니다. 공격이 시작되니까 지레 겁을 먹은 엘루아살이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거대한 휘장에 불을 지르고, 지하통로를 따라 예루살렘을 빠져 나갔습니다.
때마침 불어오기 시작한 세찬 바람으로, 본당과 부속건물이 화염에 휩싸였습니다.
세찬 불길은 8월8일부터 사흘 동안 성전 건물을 완전히 태웠습니다.
예루살렘 안에 있던 반군은 오합지절이었습니다. 변변한 무기도 없었습니다. 단숨에 포로로 잡혔습니다.
예루살렘을 평정한 티투스는 시카리당의 시몬과 기스칼라의 요한을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만으로도 서기70년 예루살렘 명망은, 유대의 종파분자들 자중지란으로 파국을 맞았다는 사실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거기에는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을 믿었던 원시 기독교도 포함됩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그리스어로 번역한 『유대전쟁사』를 영문으로 다시 번역한 헨리 스테빙은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요세푸스의 『유대전쟁사』를 읽으면, 성경의 장엄한 진리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전율할 만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헨리 스테빙은,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에 홀려도 단단히 홀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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