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마가복음13장은 국란과 거짓예언을 얼버무린 헛소리

                                          출처 / 구글 / 네로 황제 

(마가복음13장 3~26절)
‘예수께서 감람산에서 성전을 마주 대하여 앉으셨을 때에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안드레가 종용히 묻자오되 우리에게 말하소서. 어느 때에 이런 일이 있겠사오며 무슨 징조가 있겠습니까?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내가 그로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케 하리라. 난리와 난리 소문을 들을 때에 두려워 말라. 이런 일이 있어야 하되 끝은 아직 아니니라.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여 일어나겠고 처처에 지진이 있으며 기근이 있으리니 이는 재난의 시작이니라. …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보라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행하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백성을 미혹케 하려 하리라. 너희는 삼가라. 내가 모든 일을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그 때에 환난 후 해가 어두워지며 달이 빛을 내지 아니하며, 별들이 하늘에서 떨어지며 하늘에 있는 권능들이 흔들리리라.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큰 권능과 영광으로 오는 것을 사람들이 보리라.’

『유대 전쟁사』는 요세푸스가 로마에 있으면서 서기75년부터 쓰기 시작하여, 42세가 되던 해(AD79)에 완성했다. 『유대 고대사』는 56세에 완성했다.
『유대 고대사』는 유대주의를 로마인들에게 알리기 위하여 라틴어로 썼다. 『유대 전쟁사』는 터무니없는 거짓말이라서, 로마인들이 모르는 팔레스타인 지방의 사투리 아람어로 썼다.
그런데 서기65부터 연이어 나오기 시작한 마가, 마태, 누가, 요한복음은 그리스어로 썼고, ‘로마군이 마을들을 방화하고, 들판에 있는 가축들을 잡아가고, 전쟁 능력이 있는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약한 자들을 잡아갔다’는 내용이 없다.
애초부터 그런 일은 없었다.
로마제국의 도시들은 ‘팍스 로마나’로, 평화와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로마군이 유대인들을 괴롭혔다는 식의 거짓말은 통하지 않았기 때문에 써먹지 않았다.

그 당시, 무능한 네로 황제의 실정으로 갈바, 오토, 비텔리우스, 그리고 베스파시아누스가 대립각을 세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사령관들의 힘겨루기였다.
로마의 시민을 비롯하여 속주 백성은 전쟁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세푸스 중후군’에서 자유롭지 못한 유대인들 중에서 - 특히 신원을 알 수 없는 마가, 마태, 누가, 요한복음서 저자들은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가 팔레스타인 지역에 왔다는 사실 하나만 가지고도 자신들의 적으로 여겼으며, 종파분자들의 자중지란과 거짓 예언을 얼버무리면서 ‘마가복음13장’과 같은 터무니없는 거짓말을 만들어 냈다.

유대인들은 일찍이, 예언과 묵시문학(?)을 발전시켰다.
예언과 묵시문학은 사회의 고질적인 부패와 비윤리적 행위를 감쪽같이 숨기고, 면죄부로 써먹을 수 있는 편리한 표현 수단이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처럼 ‘이사야’의 대속 사상이 있었기에, 겨자씨 한 알의 비유를 통해서 모든 사람은 ‘태생적 창조 정신과 자력갱생의 정신력으로 새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나사렛 예수를 ‘부활한 그리스도’로 둔갑시킬 수 있었다.
물론 여기에는, 예수를 십자가상에서 죽게 한 어리석은 무리가 있었다.
예수의 시신을 매장하지 않고 동굴무덤에 넣어서, 은밀한 미스터리와 허망지설 중심에 들게 한 바리새인들의 정치적 음모가 있었다.
대부분 유대인들은 자기기만에 빠진 ‘요세푸스 중후군’ 환자들이었다.
반사회적 인격 장애인들이었다.
고질적인 부패와 비윤리적 행위 자체가 얼마나 나쁜 것인지 스스로 깨닫지 못하는 한심한 사람들이었다.

칼리굴라는 서기37년 3월16일 제위에 오르고, 7개월이 되던 어느 날 고열로 신음하는 중병에 걸렸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너나할 것 없이 황제의 안부를 묻는 것이 인사가 되었다. 칼리굴라의 얼굴이 들어 있는 신상 앞에서 쾌유를 비는 제사가 유행처럼 번져나갔다.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해변 도시 얌니아에 거주하는 그리스인들이 황제의 쾌유를 비는 제사를 지내고 있을 때, 유대인들이 소란을 피우면서 방해하다가 사상자가 발생했다.
얌니아 사건을 알게 된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 거주 그리스인들이 유대인들에게 보복성 공격을 가했다.
유대인 선박을 비롯하여, 상가에 불을 지르고 물건을 약탈하고, 유대인 회당에 유피테르 신상을 세웠다. 그리스 지도자 아피온이 이집트 총독 아빌라우스 플라쿠스와 함께 자행한 일이었다(AD39).
서기40년 3월, 필로가 대표단을 데리고 로마에 도착했다. 그리스인들로부터 입은 피해보상과 회당에 세워진 신상 철거를 탄원하기 위해서였다.
그들보다 한 발 앞서, 아피온이 사람을 보내 자초지종을 알렸다.
“유대인들은 황제께 경의를 표하지 않는 자들입니다. 도시마다 유피테르 신상을 세울 때 그들은 동참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제사지내는 것을 방해하려고 폭력을 행사했습니다.”
칼리굴라는 자기를 신으로 대접하지 않는 유대인들을 괘씸하게 여겼다. 그래서 필로를 만나주지 않았다.
문전박대를 당한 필로가 돌아가면서 말했다.
“황제가 우리에게 나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야훼를 자기 적으로 삼은 것과 마찬가지니까, 그분께서 알아서 하실 것이다. 우리는 용기를 잃지 말자.”
아무리 심기가 불편하더라도 함부로 내뱉을 말이 아니었다.
갈리아 지역에 갔다가 돌아 온 칼리굴라가 필로가 한 말을 전해 듣고 서기40년 5월 말경, 유대총독 헤레니무스 카피토에게, 자발적으로 유대인들이 예루살렘 성전에 신상을 세우게 하라는 공문을 보냈다.
유대인들이 신상을 세우지 않겠다면서 결사 항쟁을 선언하니까 칼리굴라는 유대총독을 소환하고, 다시 시리아 총독 페트로니우스에게 똑같은 지시를 내렸다.
유대 왕 아그립바가 페트로니우스를 찾아가서, 자기가 칼리굴라를 설득하면 신상 건립을 취소할 수 있다고 장담했다.
아그립바가 급히 로마로 달려갔지만 신상 건립 취소는 말도 꺼내지 못하고 되레, 칼리굴라가 주는 비밀문서를 페트로니우스에게 전달했다.
“아무래도 그대는 내 명령보다 유대인들 선물을 더 좋아하는 것 같소. 총독 임무에 충실하기보다는 유대인들 호의를 선택했다면, 나에 대한 도전이요. 나는 명령에 불복종하면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명확하게 해둘 필요가 있소. 당신 스스로 인생의 결말을 짓기 바라오. 잘 가시오.”
그런 다음, 이집트 총독 플라쿠스에게 예루살렘에 가서 신상을 세우라고 지시했다.
유대인 회당에 이미 신상을 세운 전력이 있었던 플라쿠스 총독이 예루살렘에 도착하니까, 신상 건립은 기정사실화 되었다.
그러자 재앙을 선포한다는 예언자들이 나타나서,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러므로 너희가 선지자 다니엘의 말한바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보거든 그 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할지어다. … 그 때에 큰 환난이 있겠음이라 창세로부터 지금까지 이런 환난이 없었고 후에도 없으리라.’

칼리굴라는 제위에 오르고, 초기에는 선정을 베풀면서 존경을 받았다.
말썽 많은 예루살렘에 로마인 총독을 보내고, 아그립바에게는 유대 왕 칭호를 주면서 빌립이 죽고 공석 중인 유대 북부지역으로 가라고 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성적 판단이 가능했다.
그러다가 중병을 앓고 난 다음부터 포악성을 드러내면서 원성을 샀다.
칼리굴라의 행태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판단한 근위대장 카이레아가 클라우디우스를 찾아가서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자네는 대담하고 단호하게 대처해야 하네.”
게르마니쿠스 사령관의 참모였으며, 대를 이어 충성심을 보였던 근위대장 카이레나는 칼리굴라의 횡포가 도를 넘었다면서 회한의 눈물까지 흘렸다.
냉정을 되찾은 그는,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길지 자신도 모르겠다면서, 클라우디우스에게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당부했다.
클라우디우스는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힘에 떠밀리는 느낌을 받았다.

서기41년 1월 24일,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 바치는 축제가 팔라티움 경기장에서 있었다.
황제 일행이 점심을 먹기 위하여 황궁으로 가는 비좁은 통로에서, 근위대장 카이레나와 부관 코르넬리우스 사비누스가 칼리굴라를 살해했다.
그런 다음, 클라우디우스에게 자기를 황제 살해범으로 원로원에 고발하게 했다.
클라우디우스는 황제 살해범을 현장에서 체포한 모양새로 원로원에 갔다. 이미 죽을 각오가 되어 있었던 카이레나는 사형장에서 숨을 거두었다.
원로원의 추대로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는 예루살렘으로 전령을 보내, 플라쿠스 총독에게 신상 건립을 없었던 일로 하고, 이집트로 돌아가라고 했다.
서기41년 2월10일, 플라쿠스 총독은 이집트로 돌아갔다.
시리아의 항구도시 티루스(티레) 공방에서 만들어진 신상이 운송 도중, 유대인들 손에 박살이 났다.
이처럼 신상건립은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르니까 서기40년 재앙을 선포한다는 예언자들이 했던 말을, 서기30년 예수가 예언한 것처럼 만들어서, 서기70년 무렵 마가와 마태복음 작가가 발표했다.

마가복음13장에는 (멸망의 가증한 것), (난리와 난리), (나라가 나라를 대적하고), (지진과 기근)이라는 자극적이면서도 민감한 용어가 많이 있다.
기독교의 목회자들은 이와 같은 용어를 가지고 설교하기를 좋아한다.
‘태생적 창조 정신과 자력갱생의 정신력으로 새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나사렛 예수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데도 예수가 말한 것처럼 이야기한다.
목회자들은 ‘요세푸스 증후군’을 확산시키는 데 열성적이다.
요세푸스가 아람어로 쓴 『유대 전쟁사』를 훗날 누군가가 그리스어로 번역했다.
그리스어를 다시 영문으로 번역한 헨리 스테빙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를 읽으면, 성경의 장엄한 진리와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전율할 만큼 확실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러나 앞으로는 이따위 황당무계한 이야기는 더 이상 용납되지 않을 것이고, 기독교가 받을 타격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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