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서기70년 유대 멸망을 초래한 <요세푸스 중후군>

                                                          출처 / 네이버 / 예루살렘 멸망
 

‘로마군은 요세푸스의 공격에 화가 치밀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그들은 평지의 마을들을 방화하고 들판에 있는 가축들을 잡아가는가 하면, 전쟁 능력이 있는 유대인들을 닥치는 대로 학살하고 약한 자들을 잡아갔다. 이에 전 갈릴리 지역은 온통 피바다와 불바다가 되고 말았다. 갈릴리에서는 저질러지지 않은 불행과 비극이 없을 정도로 온갖 불행과 비극이 만연했다. 그리하여 갈릴리 인들의 피신처라고는 요세푸스가 성벽을 쌓아 요새화한 도시들밖에 없었다.’ (유대 전쟁사 제3권 중에서)
 
서기66~70년에 벌어진 유대 반군과 로마군 전쟁을 기사화한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는 조국의 패망과정을 패배자의 관점에서 썼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다.
‘순탄치 못한 역사 속에서 패배자의 기록은 소실되기 마련인데 현존하고 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면서 기독교계에서는 호들갑을 떨었다.
그러나 『유대 전쟁사』는 패자의 기록이 아니었다.
자중지란으로 유대를 파국으로 몰고 갔던 종파분자들의 만행이었고, 미신과 우상숭배자들의 싸움질이었고, 병적인 <자기기만 증후군>이었다.
<자기기만 증후군>은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이 모르고 있거나, 거짓말을 진실이라고 철석같이 믿을 때 나타난다. 위증한 환자의 경우, 말과 행동이 너무나도 능청스러워서 거짓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요세푸스는 <자기기만 증후군>의 대표 격이었다.
제작 연도가 불분명하고,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복음서 저자들 마태 마가, 누가, 요한도 상습적으로 거짓말을 반복했기 때문에 요세푸스와 동급인 반사회적 인격 장애인들이었다.
항간에 나돌고 있던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을 가지고, 기독교를 창시한 바울도 마찬가지였다.
프랜시스 베이컨(1561~1626)은 인간이 지식을 추구할 때 범하는 네 가지 오류를 '우상'에 비유했다. 인류의 공통적인 지적 결함으로 생기는 오류에 빠지면 ‘종족의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되고, 개인의 지적 특성으로 생기는 오류에 빠지면 ‘동굴의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되고, 언어 사용에서 생기는 오류에 빠지면 ‘시장의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되고, 스콜라 철학과 같은 잘못된 철학에 빠지면 ‘극장의 우상’을 섬기는 자가 된다.
 
어떤 경우에 <자기기만 증후군>이 나타날까?
자기 체면이 깎이고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훼손이 심각할 때 나타난다.
유대인들은 약소민족의 설음 속에서 살았다. 강대국 지배에서 자력으로는 도저히 벗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래에 대한 비전이 불투명했다. 그런데다가 제각각이었다.
모세의 5경에 포함된 ‘신명기’에서 비롯된 계약사상과 선지자가 쓴 ‘이사야서’가 암시하는 대속사상은 내용이 상충되는 것이라서 갑론을박이 끊이지 않았다.
‘신명기’의 계약사상은 유대 민족이 애급을 비롯하여 바벨론과 시리아에 의하여 핍박을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인정했다.
핍박은 어디까지나 연단의 과정이기 때문에 연단의 과정이 끝나면, 세상에서 가장 성스러운 예루살렘에서 축복 받은 삶을 살 수 있게 된다는 긍정적 사상을 골자로 하고 있었다.
‘이사야서’는 정반대의 주장을 폈다.
누군가가 대속으로 죽지 않으면, 고난의 시대는 끝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라 …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러한 대속 사상은 그리스인들의 ‘디오니소스’, 로마인들의 ‘바쿠스’를 연상시키는 내용이었다.
사두개파의 사제들은 ‘신명기’를 좋아했다.
광야의 수도원 에세네파 사람들은 ‘이사야서’의 대속사상을 대대적으로 선전했다.
침례요한을 비롯하여 유대광야의 수도원 사람들은 사두개파 사제들을 끊임없이 공격하는 형극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유보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싸움을 붙이고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했다.
서기30년 유월절, 바리새인들은 예수의 시신을 동굴무덤에 넣어 은밀한 미스터리와 허망지설 중심에 들게 했다.
어리석은 여인들로 하여금 예수가 부활했다고 거짓말을 하게 하면서 싸움을 붙인 대표적인 사례가 된다.
 
헤롯왕이 사망(BC4)하고, 셋째 며느리였던 베레니케는 유산을 상속 받지 못하고 딸 헤로디아(11세)와 아들(6세)을 데리고 로마로 갔다.
베레니케의 남편은 시리아 주둔 군단 사령관 바루스 휘하의 장교로 복무 중에, 헤롯이 노환으로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여리고성으로 가다가 괴한에게 살해당했다.
베레니케는 사령관 바루스를 찾아가서, 클라우디우스 모친 안토니아를 소개 받았다. 안토니아도 남편 드루수스가 죽고, 로마에 유학 온 동방의 왕자들을 보살피고 있었다.
두 여인은 처지가 비슷했다. 가사도우미로 일하게 된 베레니케는 유학 온 고만고만한 또래 아이들 돌보면서 성실하게 일했다. 안토니아는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망측한 종교적 관습이 눈에 거슬리긴 하지만 베레니케는 정직한 내 친구랍니다. 최고의 살림꾼이죠.”
망측한 종교적 관습이라는 표현은 유대인들에게 따라붙는 수식어였다. 특히 베레니케는 유대인임을 고집스럽게 내세웠다. 아들이 장성하면 유대 왕이 될 것이라는 기대를 했기 때문에 유난을 떨었다.
기원전15년, 극동 지역 사령관이었던 마르쿠스 아그립바가 예루살렘 성전 본당 준공식과 헤롯왕 대관식에 참석하고는, 청동 포도주 잔과 황소 100마리를 선물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아들의 이름을 아그립바라고 불렀다.
클라우디우스와 아그립바는 여섯 살 동갑나기였다. 한 집에서 살면서 친형제처럼 사이가 좋았다.
장성한 아그립바가 유대 왕으로 가기를 원했지만 티베리우스는 거절했다.
종파분자들의 자중지란으로 말썽이 잦았기 때문에 성품이 유약한 아그립바가 왕권을 제대로 행사할 수 없다면서 보내지 않았다.
티베리우스가 노환으로 죽고, 칼리굴라가 제위에 오르면서 아그립바에게 유대 왕 칭호를 주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는 총독을 보내면서 빌립이 죽고(AD34) 공석 중인 유대 북부 지역으로 가라고 했다.
칼리굴라도 아그립바가 제대로 왕권을 행사할 수 없다고 보았다.
칼리굴라가 근위대장 카이레나에게 살해당하고 제위에 오른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립바의 소원을 들어주면서 명실상부 유대 왕이 되게 했다.(AD41)
그러나 아그립바는 예루살렘에 도착하기 무섭게 사두개파의 사제들로부터 배척을 당했다. 기회를 노리던 바리새인들이 아그립바의 호위무사를 자청하면서 아그립바는 바리새인들 허수아비 왕 노릇을 하다가 서기44년 클라우디우스 생일 축하 연극 공연을 관람하던 중 누군가가 건네 준 음료수를 마시고 죽었다.
아그립바(54세)가 죽고, 유족으로는 부인 키프로스와 아그립바2세(17세)와 두 딸이 있었다. 클라우디우스는 아그립바2세가 장성할 때까지 총독을 보내 유대를 다스리게 했다.
아그립바2세가 26세가 되던 해(AD53), 정식으로 유대 왕으로 책봉했다. 그러면서도 계속 해서 총독을 보내면서 신경을 쓰다가 다음해 사망했다.
이처럼 클라우디우스가 신경을 썼기 때문에 네로 황제도 관례에 따랐을 뿐 유대에 대해서 별다른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다가 16세에 제위에 오른 네로는 모친 아그리피나가 섭정을 했기 때문에 갖가지 사건에 휘말리면서 서기59년 모친을 살해하고,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 무렵부터 변방의 사령관들이 반역을 꾀하면서 기회를 노렸기 때문에 서기64년부터 네로 는 있으나마나한 존재였다.
 
                                                         출처 / 구글 / 요세푸스 유대 전쟁사  

시리아 주둔 로마군은 정예부대로 편성되어 있었다. 시리아 국경선 너머의 파르티아가 언제 침략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런데다가 시리아 총독은 로마 군단 사령관을 겸하고 있었다.
코르불로(AD60~63), 갈루스(AD63~67), 무키아누스(AD67~69) 세 총독은 이름이 세상에 널리 알려진 용맹스러운 사령관들이었다.
코르불로는 기원전3세기 후반부터 서기 6세기 중반까지 가장 뛰어난 15명의 로마군 사령관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었다. 폼페이우스, 카이사르, 게르마니쿠스처럼 전략에 뛰어났고 부하를 아끼는 지휘관이었다.
코르불로는 아르메니아 문제로 마찰을 빚었던 파르티아와의 외교 문제를 해결한 다음, 로마에 가서 네로 황제를 보좌하고 있었다.
젊은 장교들이 비밀리에 황제로 추대하려다가 밀고자가 있어서 실패하고, 코르불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AD63).
갈루스는 코르불로의 수석 참모였다. 상관이 로마로 돌아가고, 사령관을 이어받았다. 서기66년 10월 중순경, 종파분자들이 말썽을 피우니까 유대총독 폴로루스가 도움을 요청했다. 갈루스는 팔레스타인 지역으로 이동 중에 병을 얻어 투병 중에 있었다.
아그립바2세가 달려가서, 자기가 책임지고 사태를 수습하겠다고 말했다.
갈루스는 아그립바2세에게 맡기고 시리아로 돌아갔다.
무키아누스는 갈루스의 수석 참모였다. 서기67년 갈루스가 병으로 죽고, 시리아 총독과 군단 지휘권을 자동적으로 넘겨받았다.
 
서기67년 2월, 베스파시아누스(AD9~79)가 3개 군단 병력을 이끌고 안디옥에 도착했다. 부하 몇 명만 데리고, 시리아 총독 무키아누스를 찾아갔다.
출신성분이 낮은 베스파시아누스는 젊은 시절,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3인방이었던 나르키소스의 눈에 들어 로마군 지휘관이 되었다.
브리타니아(영국) 침공에 참가해서 선봉대장으로 여러 부족을 정복하고 20개가 넘는 도시를 수중에 넣었다(AD43). 그때 무키아누스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하급 장교였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집정관을 역임했다(AD51). 그러나 나르키소스가 자살(AD54)한 다음부터, 아무런 직책도 얻지 못했다. 양봉업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다가 페트로니우스의 추천으로 다시 아프리카 총독으로 갔다(AD63).
서기66년 가을, 로마로 돌아온 베스파시아누스는 네로의 수행원으로 그리스로 갔다.
황제의 음악 공연 중에 잠시 졸았다. 이 모습을 본 네로가 자기를 무시했다면서 죽이려고 했다. 페트로니우스가 기지를 발휘하여 죽음을 모면했다.
“오르페우스는 노래로 맹수를 잠들게 했다지만, 보시다시피 베스파시아누스를 잠들게 한 폐하의 실력 또한 그에 못지않습니다.”
이처럼 네로는 사람을 알아볼 줄 몰랐다. 국정도 돌보지 않고 놀기만 하다가 측근들로부터 외면을 당했다. 그렇게 되니까 변방의 사령관들이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를 반갑게 맞이했다. 두 사람은 모종의 약속을 하고,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로 갔다.
나일 강 삼각주에 있는 황실 농장 책임자는 유대인 필로의 동생이었다. 그의 아들 ‘알렉산더’가 이집트 총독을 하고 있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그들 부자를 포섭하여, 수확한 곡물을 로마로 운송하지 못하게 했다. 그 바람에 네로에 대한 로마 시민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티투스와 무키아누스는 베스파시아누스를 제위에 오르게 하려고 일을 꾸미고 있었다.
제일 먼저 도전장을 낸 사람은 이스파니아 총독 갈바였다.
그런데 원로원은 갈바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했다. 그렇지만 근위대 병사들은 더 이상 네로 황제를 지켜주지 않으려고 했기 때문에 겁에 질린 네로는 로마 인근의 은신처에 있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AD68).
네로가 죽고, 73세 고령의 갈바가 로마에 와서 제위에 올랐다(AD69).
그해 겨울, 내전을 원치 않았던 베스파시아누스는 황제가 되려던 생각을 접고, 티투스를 축하 사절로 보냈다. 티투스가 로마로 가던 중 코린트에서 갈바의 살해 소식을 듣고 되돌아갔다.
갈바는 원로원이 자기를 국가의 적으로 규정한 것에 대해서 앙심을 품었다. 그래서 로마에 오기 무섭게 정적들을 처형했다. 그런 다음, 후계자를 정할 때, 근위대 병사들의 지지를 받고 있는 오토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을 지명했다.
제위에 오르고 7개월이 되는 1월 15일 오토가 갈바를 살해했다.
1월 16일, 새 황제가 된 오토는 경쟁 상대였던 아울루스 비텔리우스와 싸워야 했다.
게르마니아 군단 병사들이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추대하고 로마를 향해서 오고 있는 사이에 오토가 갈바를 살해했던 것이다.
오토(37세)는 자기 휘하 병사들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했다. 그러나 부친 루키우스 비텔리우스 후광으로 막강한 지지 세력을 가지고 있던 비텔리우스(54세)를 당할 수 없었다. 오토는 전세가 불리하자 4월 16일 자살했다. 황제가 되고 3개월만의 일이었다.
원로원은 비텔리우스를 황제로 승인했다. 그런데도 두어 달이 지난 6월 말경에야 로마에 왔다. 베스파시아누스의 눈치를 보다가 조용하니까 로마에 와서 제위에 올랐다.
황제가 된 후, 그는 날마다 파티를 열고 호사스러운 생활을 하면서 네로 때문에 파탄 난 황실재정을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
그 때문에 황제 옹립의 일등공신이었던 카이키나의 불신을 사게 되었고, 휘하 장병들도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로마의 정세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던 티투스와 무키아누스는 69년 7월1일, 베스파시아누스를 황제로 추대한다고 선언하고, 무키아누스가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향했다.
10월24일, 베드리아쿰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이때 필로의 조카 ‘알렉산더’와 변절자 요세푸스와 다른 유대인들도 참전했다.
비텔리우스는 전세가 불리하자, 제위에서 물러나겠다고 먼저 말했다. 그런데도 근위대 병사들과 로마시민이 황궁으로 몰려가 결박하고 거리로 끌고 다니면서 조롱하다가 12월20일 살해하고 시신을 테베레 강에 버렸다.
12월21일, 원로원은 만장일치로 베스파시아누스를 새 황제로 승인했다(AD69). 그런데도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서 오지 않고 열 달이 지난 서기70년 10월 로마에 왔다.
그 열 달 동안, 무키아누스는 수도 로마의 치안을 안정시키면서 이탈리아 북부 갈리아 주민들이 입은 피해 보상을 원로원 의원들이 하게 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비텔리우스 지지자들을 회유하기 위해서였다.
무키아누스는 신분이 낮은 베스파시아누스의 권력을 확고하게 만들기 위하여 원로원을 소집하고, ‘황제 법’을 통과시켰다. 이처럼 내란 진압과 갈리아 반란을 사전에 차단한 무키아누스는 자신의 전과를 내세우지 않았다. 그는 베스파시아누스가 제위에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 있으면서 바닥난 황실 재정 복구에 주력했다. 황실 소유 토지 일부를 팔고, 유대와 그리스 부자들의 협조를 구했다. 이때 유대인 필로와 황실 농장 책임자였던 ‘알렉산더’ 역할이 컸다. 베스파시아누스는 ‘알렉산더’를 근위대 대장으로 임명할 정도로 유대인들을 신뢰했다.
이처럼 베스파시아누스는 이집트에서 재정 확보에 주력하는 동안, 티투스는 파르티아 인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다.
티투스는 부친의 황제 옹립에 주력하면서 유대 왕 아그림바2세도 각별한 사이었다. 그의 여동생을 아내로 맞이했다.
그런데도 요세푸스의 『유대 전쟁사』에 보면, 얼토당토 않는 기사가 있다.
“베스파시아누스는 가다라에 입성하자마자 모든 젊은이들을 하나도 남겨 놓지 않고 모조리 학살하였다. 로마인들은 유대국에 원한을 품고 있었고 특히 케스티우스(칼루스)의 참패로 인한 적개심이 불타오르고 있었기 때문에 연령에 관계없이 닥치는 대로 학살했다.”
이것은 약과였다.
요세푸스의 기록에만 의지해서 수를 세면, 100만이상의 유대인들이 유대 전쟁에서 희생되었다는 터무니없는 거짓말도 있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2, 침례요한과 안티바 그리고 예수

21, 헤롯왕과 예수 탄생 관련 기사는 역사의 날조

22, 헤롯의 유아살해는 새빨간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