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 헤롯왕과 예수의 연대기적 이해

                                                         출처 / 구글 / 열두 살 예수
 

(누가복음2장 40~52절)
아기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그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을 당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될 때에 저희가 이 절기의 전례를 좇아 올라갔다가 그 날들을 마치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는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그 부모는 이를 알지 못하고 동행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후 친족과 아는 자 중에서 찾되, 만나지 못하매 찾으면서 예루살렘에 돌아갔더니, 사흘 후에 성전에서 만난즉 그가 선생들 중에 앉아 저희에게 듣기도 하시며 묻기도 하시니, 듣는 자가 다 그 지혜와 대답을 기이히 여기더라.
그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 모친이 가로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양친이 그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헤롯왕은 기원전4년에 죽었다. 예수는 서기1년에 태어났다.
누가복음에 있는 헤롯왕과 예수 탄생 관련 기사는 시기적으로 맞지 않거니와 유아 살해는 정치적 의도가 깔린 조작 기사였음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어렵사리 찾아낸 연대기적 자료를 보면, 헤롯왕과 예수는 현실을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는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였다. 바리새인들로부터 집단 괴롭힘을 당한 공통점도 있었다.
헤롯은 자수성가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자비를 들여 성전 산을 축조하고, 그 위에 성전을 새로 지었다. 민심을 얻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한 현명한 통치자였다.
현명한 통치자에게 협조는 못할망정 되레,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다. 성전 무용론을 주장하면서 헤롯을 괴롭혔다.
성전 무용론은 헤롯 사망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서기8년 유월절, 사제의 뜰에서 죽은 사람의 뼈가 발견되었다.
보나나마 종파분자들 소행이었다.
범인을 검거한다면서 야단법석을 떨다가 엉뚱하게도 예루살렘에 와 있던 사마리아인들을 의심하면서 폭행을 가했다.
안토니요새의 망루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코포니우스’ 총독이 폭력 사태를 막았지만, 사마리아인들과는 견원지간이 되고 말았다.
 
헤롯을 비난하거나 성전 무용론은 혼란한 시국의 대세였다. 성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이 고조된 가운데 유월절 행사 때마다 경계는 삼엄해졌다.
종파분자들의 행태가 심각한 수준에 올라 있었고, 무고한 사람이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동류’로 오해 받을 소지가 다분했다.
속주 백성이면 누구나 내야하는 인두세도 종파분자들에게는 투쟁의 구실이었다.
단도를 숨기고 다니다가 인두세 찬성 발언을 하면, 슬며시 다가가서 찌르고 도망갔다.
이처럼 험악한 분위기 속에서도 부모를 따라 예루살렘에 온, 나이어린 예수는 헤롯이 지은 성전을 보면서, ‘내 아버지 집’이라고 말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어린아이가 그냥 해 본 소리였다고 생각한다면 이것이야말로 무지몽매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스스로 드러낸 꼴이 된다.
예수는 장성한 다음에도, 예루살렘에 와서 똑 같은 말을 했다.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요”
이것만 봐도 철없는 아이가 한 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예수는 어린 아이 때부터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정도를 걷고 있었다.
우리 주변에도 예수처럼, ‘지혜가 충족하며 …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운’ 아이들이 있다.
우리는 그 아이들을 천재라고 말한다.
예술분야와 체육 분야에서 천부적 재능을 보이는 아이들이 많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천재성을 보였으며 어른이 된 다음에도, 겨자씨 비유를 통해서 ‘태생적 창조 정신과 자력갱생의 정신력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예수는 인류 역사상 정신 문화사에 빛나는 업적을 남긴 천재였다.
 
바울이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을 가지고 기독교를 창시했다. 이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바울보다 먼저, 메시아 운운하면서 예수에게 접근한 사람이 침례요한이었다. 제자들을 보내 회유하려다가 안티바에게 죽임을 당하고 수포로 돌아갔다.
이것만 봐도 기독교는 바울 단독으로 만든 게 아니었다. 서기70년을 전후해서 파국을 자초했던 각가지 병폐와 사회악이 보여준 저질 드라마였다.
무지몽매한 유대인들은 ‘부활한 그리스도’ 미신에 빠져 있었고, 바울이 십자가상에서 죽은 예수를 자신들의 ‘이상적인 이미지’로 만들었다.
거기에 세상 종말론 따위로 허망지설을 유포하던 종파분자들이 예수의 역사적, 지리적 배경이 첨가되었다.
탄생설화와 부활에 대한 세부 내용도 윤문 되었다.
예수는 자신의 가르침이 시기상조임을 알고, 철저하게 대비했다.
비유가 아니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예수가 말한 <천국 복음>, <천국의 비밀>, <천국의 열쇠>도 비유일 뿐이다.
이처럼 예수가 숨겨놓은 보물이 있기 때문에 천국은 바다에 던진 그물과 같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나쁜 것은 버려야 한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악성 종양으로 남아 있는 사회악이 언제 곪아 터질지 모르는 일이었다.
이와 같은 사실을 알고 있었던 계몽주의자 ‘볼테르’가 말했다.
“양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독교를 공포의 눈으로 바라볼 것이다.”
“모순을 믿는 자들은 극악무도한 일을 저지른다.”
“기독교는 틀림없이 신성하다. 악행과 난센스로 가득 차 있음에도 불구하고 1700 년 동안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다.”

                                                       출처 / 구글 / 성전 산
 

성경에는 악성 종양으로 사회악이 존재한다.
니고데모와 아리마대 요셉이 예수의 시신을 동굴무덤에 넣어, 은밀한 미스터리와 허망지설 중심에 들게 했지만, 예수의 메시지는 <천국>에 숨겨져 있다.
헤롯(BC80~BC4)은 이두메인 안티파테르와 나바테아 왕국의 페트라 공주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연령별 주요 사건은 다음과 같다.
 
*14세 - 폼페이우스는 북쪽의 아르메니아 고원지대에서 발원하여 시리아 사막을 횡단하고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가로질러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유프라테스 강을 국경선으로, 강대국 파르티아와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BC66).
*15세 - 폼페이우스는 왕권 다툼이 잦은 셀레우코스 왕조를 없애버리고, 첫 번째 총독으로 ‘아이밀리우스’를 임명하면서 시리아를 로마의 속주로 삼았다.(BC65)
*17세 - 시리아의 속주였던 유대에서도 하스모니아 왕조가 왕권 다툼으로 말썽을 피우니까 폼페이우스가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말썽을 피운 자들을 검거하려고 성전의 지성소까지 살펴보고는 아무도 없더라는 말을 했다. 그리고 이두메 지역의 행정장관이었던 안티파테르에게 유대의 통치권을 주었다.(BC63)
*25세 - 안티파테르는 이두메에 있으면서 장남 파사엘을 예루살렘 총독으로, 차남 헤롯에게는 갈릴리 지역의 책임자로 보냈다.(BC55)
*32세 - 로마의 원로원이 갈리아에 있는 카이사르를 제거하려고, 폼페이우스를 로마로 오게 했다. 폼페이우스는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관용과 포용 정신’을 주장하면서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 카이사르와 싸우지 않으려고 했다. 원로원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쫓기는 신세가 되었다. 이집트를 망명지로 생각하고 그곳에 갔다가 이집트의 어린 왕에게 암살당했다.(BC48)
*36세 - 폼페이우스는 극동 지역에 있을 때, 파르티아와 불가침조약을 맺었다. 그리고 로마로 가면서 늙은 ‘크라수스’에게 파르티아 침공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그런데도 침공을 했다가 적장 ‘수레나스’ 속임수에 걸려들어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처참하게 죽임을 당하고, 독수리 문양이 새겨진 로마 군단 깃발을 빼앗겼다. 만여 명에 달하는 로마 병사가 포로로 잡혔다. 이것이 기원전54년에 발생한 카라이 패전이었다.
그 때 포로로 잡힌 로마 병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카이사르가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하고, 출정 하루 전날 원로원이 마련한 환송장에 갔다가 키케로와 원로원 의원들이 보는 가운데 암살자들 공격을 받고 죽었다.(BC44)
*37세 - 안티파테르가 유대인 말라쿠스가 베푼 연회에 참석을 했다가 독살당하고 장남 바사엘은 하스몬 가문의 안티노누스에게 살해당했다. 이와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카이사르 암살 주모자였던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와 마케도니아 총독 브루투스와 반역을 도모하고 있었으며, 마크 안토니는 알렉산드리아에서 카이사르 유지를 받들기 위하여 파르티아 원정을 준비 중에 있었다.(BC43)
*40세 - 부친의 원수를 갚기 위하여 헤롯이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마크 안토니로부터 유대 왕 칭호와 3천의 용병을 가져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BC40)
 
용병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용병들에게 줄 돈이 있어야 하고, 무기와 군복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숙식을 제공해야 한다.
헤롯은 25세부터 갈릴리 북쪽의 울창한 자연림에서 벌목한 백향목을 팔아서 큰돈을 벌었다.
로도스 섬에서 시작된 유리 제조 기술을 배워 양질의 원료가 풍부한 시돈과 티루스에서 여러 가지 색깔을 동시에 집어넣을 수 있는 대롱불기 신기술을 개발하고, 알록달록한 고가의 유리 제품을 생산하여 불티나게 팔았다.
이집트인들이 만든 두루마리 형태의 파피루스를 두 뼘과 세 뼘 크기로 절단하여, 20~30매씩 묶어서 팔았다.
배를 건조할 때 필요한 점성이 강한 역청도 사해의 갯벌에서 만들었다. 이처럼 다양한 제품을 생산 판매하면서 무역선단도 운영했다.
그렇게 되니까 지중해 인근의 여러 항구에 토지와 건물을 소유하면서 헤롯은 자수성가한 전설적인 인물로 유명세를 누렸다.
 
*43세 - 헤롯은 갈릴리의 세포리에서 드라키아족 가을족 튜론족으로 편성된 3천의 용병을 모집하고, 갈릴리 지역에서 다윗 왕 후손을 자처하던 에제키아를 죽였다.
그런 다음,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공격은 하지 않았다. 용병들로 하여금 성문을 지키게 하고, 생필품과 희생 제물로 쓸 가축의 반입을 허용하면서 백성의 환심을 사려고 했다.
마크 안토니는 용병이 부족해서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는 줄 알고, 시리아 총독으로 가게 된 소시우스에게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헤롯에게 주라고 했다.
성을 단숨에 함락시킨 소시우스는 히루카누스2세를 포로로 잡아갔다. 명실상부 유대 왕이 된 헤롯은 히르카누스2세의 손녀 마리암메와 결혼했다.(BC37)
*45세 - 헤롯은 포로로 잡혀 간 히루카누스2세의 귀국을 주선했다. 헤롯은 그의 귀국을 진심으로 원했으며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경의를 표했다. 공식 석상에서는 항상 히르카누스에게 한 단 높은 좌석에 앉게 했다.
부인 마리암메의 동생(16세)를 대제사장에 추대하고, 여리고 성에서 초막절 제사를 지내고 만찬 중에 정원에서 혼자 놀던 어린 대제사장이 연못에 빠져 죽었다.(BC35)
*46세 - 바리새인들이 마리암메가 헤롯이 동생을 물에 빠트려 죽였다고 거짓말을 했다. 헤롯을 원망하다가 마리암메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BC34)
*48세 - 로마의 원로원은 옥타비아누스를 이집트 원정군 최고사령관으로 선출.(BC32)
*49세 - 출신 성분이 의심스러운 마이케나스가 옥타비아누스와 마크 안토니를 이간질하여 싸우게 하고, 악티움 해협으로 마크 안토니를 오게 해서 치명적인 피해를 입혔다. 속임수에 걸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이집트로 돌아갔다.(BC31)
 
옥타비아누스와 마크 안토니가 악티움 해협에서 싸울 때, 헤롯은 3천의 용병과 함께 사해 근처의 마사다 요새에 있었다.
무역 선단을 가지고 있었던 헤롯은 정보 수집 능력이 탁월했다.
옥타비아누스와 마크 안토니 관계가 좋지 않다는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기 때문에 파르티아 국경 지대에 마사다 요새를 구축하고, 그곳을 지키겠다고 말했기 때문에 어느 편에도 끼지 않았다. 이처럼 헤롯은 현명하게 대처했다.
 
*50세 -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가 자살했다. 극동 지역 사령관으로 오게 된 마르쿠스 아그립바(32세)와 헤롯은 친밀한 사이가 되었다.(BC30)
*54세 - 사두개파의 보에투스를 대제사장에 임명하고, 바리새인들과는 거리를 두고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BC26) 그들은 하스모니아 왕조의 왕자들을 이간질하면서 국정농단을 자행한 전력이 있는 자들이었다.
*56세 - 예루살렘에 회당이 없었던 바리새인들은 시온산 정상에서 집회를 가지면서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헤롯이 그곳에 궁전을 짓고 건물 하나를 바리새인들에게 주었다. 가까이에 두고, 감시하기 위해서였다.(BC24)
*58세 - 성전 산 축조 공사가 끝나고, 높은 지대의 흙을 낮은 지대로 옮기면서 성전 뜰을 넓히는 평탄 공사를 하는 중이라서 성전 봉헌식을 언제 할 지 아무도 몰랐다. 그처럼 일이 많았다.
*61세 - 급한 대로 매립이 끝난 곳에 본당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BC19)
*65세 - 성전 본당 건물 준공식과 함께 헤롯왕의 대관식도 했다. 귀빈으로 초대 받은 마르쿠스 아그립바가 100마리 황소를 선물로 주었다.(BC15)
*66세 - 흑해 연안의 보스포루스 왕국의 폴레모 왕이 해적의 공격을 받고 구원을 요청했다. 마르쿠스 아그립바가 해군을 이끌고 갈 때 헤롯도 용병을 거느리고 참전했다.
해적을 물리친 다음, 소아시아 서부의 해안지방을 둘러보면서 아그립바가 키프로스 구리광산 채굴권을 헤롯에게 주었다.(BC14)
*67세 - 27년 동안 3천의 용병을 가지고 있던 헤롯이 ‘팍스 로마나’ 정책에 따라 용병을 해산했다. 연희를 베풀고 임금과 위로금을 주었다. 갈 곳이 없는 퇴역 장병들에게는 가이사라와 얌니아에 집성촌을 마련하고 그곳에서 살게 했다.(BC13)
*68세 - 마르쿠스 아그리피나(50세)가 지병으로 사망했다.(BC12)
*73세 - 마리암메가 낳은 아들 알렉산더가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BC7)
*76세 - 헤롯이 노환으로 얼마 살지 못한다는 소문이 나돌면서, 누군가가 독수리 석상을 산산조각 냈다. 성전 봉헌식 때 마르쿠스 아그립바가 볼 수 있는 여인의 뜰 한 쪽 구석에 있던 석상이었다. 안토니요새 망루에 있어야 깃발 대신 세운 조각상이었다.
안토니요새 망루의 로마 병사들이 달려가서 범인을 잡았다. 어이없게도 나이어린 학생이었다. 범인은 헤롯에게 보내졌다. 헤롯은 학생을 잘못 가르친 죄를 묻기 위하여 맛디아스와 또 다른 바리새인을 불러 심문을 했다.
맛디아스는 선처를 바라기는커녕 요설을 늘어놓았다.
‘모세가 야훼께 배우고 자신이 깨달은 그 율법을 우리가 존중하고, 모세가 써서 후손들에게 넘겨준 그 율법을 우리가 당신 명령보다 더 중요하게 준수하였다고 하더라도,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죽음을 당하겠으며, 당신이 우리들에게 괴롭힐 수 있는 모든 형벌을 기쁨으로 받겠습니다.’
헤롯은 분통을 터뜨리면서 두 사람을 화형으로 다스렸다.
그런 일이 있고 난 다음, 헤롯은 여리고성 별장으로 거처를 옮기고, 외지에 있던 장성한 아들들을 불렀다. 장남(36세)과 삼남(32세)이 급히 오다가 괴한들에게 살해당하고 헤롯도 노환으로 죽었다.
 
* 헤롯이 사망한 다음, 근거 없는 소문이 나돌았다.
“의심이 많은 헤롯이 두 아들을 죽이고, 자신도 천벌을 받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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