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헤롯의 유아살해는 새빨간 거짓말


                                                             출처 / 구글 / 헤롯왕의 유아 살해
 

(마태복음2장 11~23)
(동방박사)가 아기와 그 모친 마리아의 함께 있는 것을 보고 엎드려 아기께 경배하고 보배합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
꿈에 헤롯에게로 돌아가지 말라 지시하심을 받아 다른 길로 고국에 돌아 가니라.
저희가 떠난 후에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급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모친을 데리고 애급으로 떠나가 헤롯이 죽기까지 거기 있었으니, 이는 주께서 선지자로 말씀하신바 애급에서 내 아들을 불렀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에 헤롯이 박사들에게 속은 줄을 알고 심히 노하여 사람을 보내어 베들레헴과 그 모든 지경 안에 있는 사내아이를 박사들에게 자세히 알아 본 그 때를 표준 하여 두 살부터 그 아래로 다 죽이니 이에 선지자 예레미야로 말씀하신바 라마에서 슬퍼하며 크게 통곡하는 소리가 들리니 라헬이 그 자식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이라, 그가 자식이 없으므로 위로 받기를 거절하였도다함이 이루어졌느니라.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급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가로되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 모친을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돌아 오니라.
그러나 아겔라오가 그 부친 헤롯을 이어 유대의 임금 됨을 듣고 거기로 가기를 무서워하더니, 꿈에 지시하심을 받아 갈릴리 지방으로 떠나가 나사렛이란 동네에 와서 사니, 이는 선지자로 하신 말씀에 나사렛 사람이라 칭하리라 하심을 이루려 함이라.
 
서기1096~1270년까지 예루살렘을 되찾기 위하여 십자군 원정을 8차례나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교황권의 쇠퇴와 기사 계급의 몰락 그리고 봉건 체제의 동요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렀다.
이 무렵, 이탈리아 북부의 페라라, 포를리, 만토바, 베로나, 파도바, 라벤나, 리미니와 같은 도시에서 참주(시뇨리아) 체제가 확고해졌다.
그런데 시민 공동체의 결정에 따라 직무를 수행하던 참주들이 은근슬쩍 자신들의 권력을 종신직으로 만들면서, 돈으로 참주가 된 자도 있었다.
용병대장 조반니 아쿠토(1320~1394)는 영국인이면서도 피렌체에서 이름을 날렸다. 용병 대장이었던 ‘프란체스코 스포르자’는 밀라노의 참주(시뇨리아)가 되었다.
이처럼 편법을 써서 참주가 된 자들은 자신들의 권력을 반석 위에 올려놓기 위하여 유럽의 지배권을 되찾으려는 가톨릭으로부터 자발적으로 서임을 받으려고 했다.
여기에 대한 가톨릭의 반응은 놀랍도록 치밀한 계책이었다.
참주들 요구를 들러주면서, 도시마다 ‘두오모’ 문화권을 만들게 했다.
도시 한 가운데 성당(두오모)을 짓게 하고, 주변에 광장을 만들고, 관공서와 상가가 들어서게 했다. 성당을 구심점으로 결속을 다지게 했다.
그렇게 되니까 개인의 창조성을 억압하고, 합리적인 사유를 하지 못하게 했던 가톨릭에게 재기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 꼴이 되고 말았다.
유럽의 여러 도시가, ‘두오모’ 중심 문화권으로 발전하게 된 것이 이 때문이었다. 그 바람에 물질문명과 동반 성장해야 하는 정신문화가 발목이 잡힌 꼴이 되고 말았다.
 
서기415년 3월, 히파티아는 ‘미신을 진리처럼 가르치는 건 끔찍한 일이라고 말했다가 무참히 살해당했다. 이후, 마녀사냥이 유럽 전역을 강타했다.
기독교 신학을 천박한 지성이라고 말한 사람이 또 있었다.
“기독교인들은 점잖은 주인 앞에서는 한 마디도 못하다가, 교육을 전혀 받지 못한 노예, 어린이, 여자들 앞에서는 씨부렁씨부렁하면서 기독교를 전한다. 이런 수준의 인간들이 믿는 종교는 미래가 암담하다.”
이렇게 말한 사람은 원로원 의원 신분이었고, 도미티아누스 황제 시절 집정관(AD92)을 역임했으며, 서기130년을 전후해서 소아시아 총독이었던 ‘가이우스 율리우스 켈수스’였다.
이처럼 성경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확산되자, 가톨릭은 성경을 아무나 보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도 16~17세기 유럽에서 로마 가톨릭 교회의 쇄신을 요구하면서 등장한 종교개혁운동과 더불어 인쇄술이 발달하면서 성경이 널리 보급되었다.
이번에도 가톨릭은 기상천외의 묘안을 생각해 냈다.
예술적 재능이 뛰어난 조각가들로 하여금 성당 건축에 동참하게 했다. 성당을 조각품으로 아름답게 꾸미게 하고, 천재 화가들로 하여금 천박한 지성을 천정화와 벽화, 그리고 스테인드글라스 유리창에도 현란한 그림을 그리게 했다.
그 바람에 성당은 온통 천재 화가들과 조각가들 작품으로 채워졌다. 그렇게 되니까 성경 내용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위대한 조각가들과 화가들 작품을 감상하고 있노라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종교적 감동과 종교 외에는 다른 세상을 상상할 수 없게 된다.
 
                                                          출처 / 구글 / 성당의 천정화  

르네상스 이후,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유럽 여러 나라와 도시에서 일어난 인간성 해방을 위한 문화 혁신 운동은 계몽주의 시대를 열었다.
‘드니 디드로’와 같은 사람은 교회와 당국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이성에 대한 신념 위에 등장한 과학, 예술, 기술에 관한 체계적인 『백과전서』를 완성했다.
그는 죽었지만, 『백과전서』 대신 컴퓨터와 인터넷망이 구축되면서 이제는 누구든지 마음만 먹으면 지식과 정보를 얼마든지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시대 변화에도 굴하지 않고, 가톨릭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여론의 기존 중간 매체였던 신문사와 출판사를 설립하고,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국을 자체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뉴미디어 시대에 들어와서도 인터넷을 활용하면서 터무니없는 미신을 진리처럼, 천박한 지성을 최고인 양 선전하고 있다.
헤롯왕은 기원전4년에 사망했다. 나사렛 예수는 서력1년에 태어났다. 시간적으로 엮으면 거짓말이 된다. 그런데도 사실처럼 선전하고 있다.
 
헤롯왕이 죽고, 예루살렘에 온 시리아 총독 퀴리니우스(구레뇨)는 헤롯의 자녀들에게 유산상속에 해당하는 토지를 나눠주었을 뿐 어느 누구에게도 왕 칭호를 주지 않았다.
아겔라오가 29세가 되던 해(AD6)에 정식으로 유대 왕이 되게 하려고 로마로 보냈다. 헤롯왕에 이어 유대를 로마와 선린왕국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러자 사마리아 여인 말타케 소생 아겔라오가 유대 왕이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유대인들이 대표단을 먼저 보내 아겔라오를 모함했다.
“아겔라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포악한 자입니다. 다윗 왕 후손을 자처하면서 말썽을 피우던 갈릴리 유다란 자가 있었습니다. 그 자는 헤롯에게 죽임을 당한(BC38) 에제키아의 아들이거니와 아비와 마찬가지로 갈릴리에서 다윗 왕 후손을 자처하면서 왕 행세를 하다가 사령관 바루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도 아겔라오는 유다의 자식들을 모조리 없애버릴 요량으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두 살 이하의 아이들을 모두 죽이라고 무뢰배들을 보냈습니다. 그 바람에 아이를 빼앗긴 여인들이 머리와 가슴을 풀어헤치고 거리를 뛰어다니면서 대성통곡을 했습니다. 그러자 아겔라오는 황제께서 그와 같은 지시를 내린 것처럼 둘러댔습니다. … 아울러 이 탄원서는 확실하고 참된 것이기에, 각계각층의 대표들이 합심하여 작성한 것입니다.”
때마침, 게르마니아 원정을 준비 중이었던 사령관 바루스가, 아겔라오와 일행을 모두 데리고 갔다.(AD6)
모함을 당해 아겔라오가 돌아오지 못하니까, 퀴리니우스는 대제사장 예복을 빼앗아 안토니요새에 보관했다.
거짓 유아살해 탄원서를 보내, 아겔라오를 왕이 되지 못하게 했으니, 대제사장이 주관하는 신정도 어림없다는 뜻에서 그렇게 했다.
그런 다음 인구조사를 실시하고, 세금 청부업자들로 하여금 인두세를 걷게 하고는 첫 번째 총독으로, 코포니우스(AD6~9)를 오게 해서 유대를 총독 체재의 속주로 만들었다.
 
이와 같은 역사적 기록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헤롯왕이 유아 살해의 만행을 저질렀다는 거짓말을 사실인 양 선전하고 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서 수많은 화가들로 하여금 헤롯이 보낸 병사들이 아이들을 잔인하게 죽이는 그림을 그리게 해서, 보는 이들로 하여금 사실인 양 믿게 하고 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AD470~544)는 기독교 신학자로 <그레고리력>과 <율리우스력>에서 쓰이는 기원후 표기(Anno Domini)를 처음 사용한 사람이다.
엑시구스는 헬라어 성경을 라틴어로 번역했으며, 니케아 공의회의 신조와 콘스탄티노플 공의회의 신조, 칼케돈 공의회의 신조도 라틴어로 번역했다.
그가 번역한 문헌들은 서방 교회에 많은 영향을 주었으며 지금도 교회의 행정에 대한 지침서로 사용되고 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가 ‘율리우스력’의 오차를 수정하고, 공포한 것이 ‘그레고리력’이다.
가톨릭을 믿는 유럽의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폴란드 사람들은 ‘율리우스력’ 1627년 10월 4일, 잠자리에 들었다가 다음 날 깨어나면서 ‘서력’ 1582년 10월 15일 아침을 맞이했다.
하룻밤 사이에 년도가 45년이 사라지고, 날짜가 10월 15일로 바뀌었다.
디오니시우스 엑시구스가 예수 탄생 년도를 정확하게 기록하고 있었기 때문에 ‘율리우스력’에서 45년을 빼고, 낮과 밤의 길이가 같은 춘분을 맞추기 위하여 날짜를 바꾸었다.
‘율리우스력’에 대한 기록은 고대 로마 역사를 연구하면 얼마든지 증빙 서류를 찾을 수 있다. 헤롯왕의 사망 년도와 첫 번째 유대 총독이 부임한 해도 ‘율리우스력’에 근거한다.
그러기 때문에 신원미상의 작가가 쓴 ‘마태복음’을 가지고, 서력기원이 잘못되었다는 주장은 사리에 맞지 않고, 터무니없는 억지소리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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