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무교절의 첫날은 유월절

                          출처 - 구글 - 예루살렘 성전


(마태복음27장 45~54절)
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 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거기 섰던 자 중 어떤 이들이 듣고 가로되 이 사람이 엘리야를 부른다 하고, 그 중에 한 사람이 곧 달려가서 해융을 가지고 신 포도주를 머금게 하여 갈대에 꿰어 마시게 하거늘 다른 사람들이 가로되, 가만 두어라 엘리야가 와서 저를 구원하나 보자 하더라
예수께서 다시 크게 소리 지르시고 영혼이 떠나시다.
이에 성소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고, 땅이 진동하며 바위가 터지고 무덤들이 열리며, 자던 성도의 몸이 많이 일어나되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
백부장과 및 함께 예수를 지키던 자들이 지진과 그 되는 일들을 보고 심히 두려워하여 가로되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 하더라.

유대인들의 하루는 해가 서산에 넘어가면서 시작된다.
예수 사건은 유월절 예비일(3월13일)에 발생했다.
그 당시의 시간과 오늘날의 시간 개념을 비교하면, 이른 아침(오전6시), 제3시(오전9시), 제6시(낮12시), 제9시(오후3시), 제11시(오후5시)가 된다.
마태복음 내용에 따르면, 낮12시부터 온 땅이 어두워지면서 오후3시에 예수가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크게 소리 지르고 영혼이 떠났다.
곧바로 성소와 지성소 사이에 있는 거대한 휘장이 찢어졌으며, 땅이 진동하였고, 바위가 터졌으며, 무덤들이 열리고, 자던 성도들 몸이 많이 일어났다.
예수의 부활과 함께 무덤에서 나온 시체가 거룩한 성에 들어가서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
이와 같은 이야기가 진짜였다고 한다면, 인류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사건이 된다.
그와 반대로, 사실무근으로 결론이 나면, 성경은 더 이상 진리가 아니다.

정오 무렵,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는 오후3시에 사망했다. 그리고 오후5시가 넘어서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신을 동굴무덤에 넣었다.
이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 대제사장 가야바가 사람들을 보내 동굴무덤을 지키게 했다.
그리고 일몰과 동시에 유월절 행사의 시작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려왔다.
성전의 번제단 도살장에서는 하루 종일 가축의 도살이 있었다.
내장과 오물은 키드론 골짜기로 흘려보냈기 때문에 까마귀들이 말끔히 먹어치웠다. 사제들은 가축의 심장과 약간의 살점을 도려내 번제단의 시뻘건 불속에 집어넣어 화염과 함께 사라졌다. 도살한 가축의 고기는 주인이 가지고 갔다.
성전 뜰에 무리를 지어 모여 있던 사람들은 미리 준비한 장작 위에 고기를 올려놓고 있다가 일몰을 알리는 나팔소리가 들려오자 일제히 장작에 불을 지피면서 왁자지껄 떠들기 시작했다.
달이 중천에 떠오르면서 화덕의 장작불도 시들해졌다.
양이나 염소 고기는 먹음직스럽게 익었다,
유월절 음식을 먹기 시작하라는 나팔소리가 들려옴과 동시에 화덕을 중심으로 모인 사람들은 통성기도를 했다.
통성기도가 끝나기를 기다리던 연장자가 구전 설화집 하가다를 낭독했다.
‘우리는 파라오의 노예였으나, 주께서 권능의 손을 펴, 우리를 이끌어내셨습니다. 찬양을 받으소서. 주님! 우리를 애급으로부터 해방시켜주지 않았더라면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영영 파라오의 노예가 되었을 겁니다. 우리에게 아무리 지혜가 많고, 아무리 전통에 충실할지라도 유월절은 언제 어디서나 되풀이 강조되고, 반복되어야 합니다.’
낭독이 끝난 연장자가 누룩을 넣지 않고 구운 떡을 높이 들고 다시 말했다.
‘보라! 이것은 고난의 음식이다. 이것은 우리 조상이 애급에서 나올 때 먹던 것이다.’
연장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모두들 달려들어 고기를 게걸스럽게 먹기 시작했다.
쓴 나물도 함께 먹었다. 유월절 음식은 해가 뜨기 전에 모두 먹어치워야 한다. 그래서 뼈도 남김없이 구어 먹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허리에 띠를 띠고, 발에 신을 신고, 손에 지팡이를 들었다. 애급에서 나올 때 모습이 그러했다는 것이다.
대제사장 가야바와 사제들도 똑같은 복장을 하고 있었다.
동쪽 하늘이 밝아오면서 사람들은 썰물처럼 성전 뜰을 빠져나갔다.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은 낮에 수면을 취하고, 해가질 무렵 다시 성전 뜰에 모였다.
마차라는 떡을 나누어 먹고, 통성기도를 하고, 구전 설화집 하가다를 다시 낭송했다.
낭송을 끝낸 사람들은 노래를 합창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무교절 둘째 날, 사람들이 다시 성전 뜰에 모였다.
무교절 관습에 따라 일을 하기 위해서였다. 평일에 하던 자기 자신과 가족을 위한 일이 아니었다. 애급의 벽돌공장에서 노동을 강요당했던 조상을 기억하면서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작업이었다. 
그러나 무교절의 본래 목적과는 달리, 사람들은 성전 뜰을 조성하는 일에 동원되고 있었다.



헤롯은 원전40년 마크 안토니로부터 유대 왕 칭호를 받았다.
헤롯은 지중해 일대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의 재력가였다. 다양한 상품을 생산 판매하면서 수십 척의 상선도 보유하고 있었다. 무역선단을 운영하면서 지중해 인근의 항구마다 토지와 건물을 가지고 있었다.
헤롯은 자수성가한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마크 안토니를 찾아가서 용병을 거느리고 싶다고 말했을 때, 마크 안토니는 흔쾌히 승낙했다. 헤롯이 사업에 성공한 부자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헤롯은 부자이면서도 신중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용병으로 예루살렘을 공격하지 않고 1년 동안이나 성을 포위하고 생필품 반입을 허용하면서 민심을 얻고, 기존의 권력 실세들과 협상을 시도했다.
이런 줄도 모르고 마크 안토니는 시리아 총독에게 성을 빼앗아 헤롯에게 주라고 했다.
그래서 헤롯은 유대인들의 원성을 사지 않고 예루살렘 입성에 성공했다.(BC37)
예루살렘에 들어와서도 시리아 총독에게 잡혀간 하스모니아 사람들의 귀환을 주선해서 돌아오게 했으며 하스모니아 공주를 아내로 맞이했다.
사두개파의 사제들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모리아 산과 오벨산 중간에 석축을 쌓고 성전 산을 조성하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발표했다.
남쪽 오벨산과 북쪽 모리아 산의 구릉지에 석축을 쌓고 성전 산을 새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사제들은 쌍수를 흔들면서 환영했다.
곧바로 실행에 옮겨졌다. 헤롯은 자비를 들여 20여 년에 걸친 석축 공사를 마무리 했다.
성전 본당 건물이 들어설 자리가 조성되기 무섭게 사제들이 본당 건물을 짓다가 매립한 땅이 주저앉으면서 신축 중이던 건물이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시 건물을 지으면서 기원전15년 본당 건물 준공식과 헤롯의 대관식도 함께 했다.

그러나 이것으로 성전 뜰 조성공사가 끝난 게 아니었다. 오늘날과 같은 성전 뜰이 조성되기까지 높은 곳의 흙을 낮은 곳으로 옮기는 작업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 작업은 헤롯왕 사망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서기30년 예수가 예루살렘 성전에 왔을 때도 계속되고 있었다.
사울과 함께 성전 뜰에 왔던 스데반도 매립이 덜 된 구덩이에서 돌에 맞아 죽었다.
그 후에도 매립공사는 계속되다가 서기54년에 끝났다.
90여 년이 지난 다음 어렵사리 성전 뜰 조성공사가 끝났다.
그러나 성전 봉헌식을 준비 중에, 성전 무용론자들 공격으로 주량 일부가 파손되었다.
봉헌식은 취소되었다가 서기62년에 마침내 성전 봉헌식을 요란스럽게 했다.
그러다가 8년이 지난 서기70년, 종파분자들의 자중지란을 더 이상 묵과할 수 없었던 티투스 장군이 로마군에게 공격 명령을 내리면서 예루살렘 성전은 한순간에 불타 없어지고 말았다.
그러니까 서기30년 예수 사건이 있던 날, 예루살렘 성전 뜰에서는 예정대로 유월절 행사가 순조롭게 진행 되고 있었다. 7일 동안의 무교절 행사도 아무 탈 없이 끝났다.
대낮이 갑자기 어두워지면서 성소의 휘장이 찢어지고, 지진이 일어나고 무덤들이 열리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마태복음27장 기록은 사실무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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