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수전절 행사를 비난하다가 살해당한 스데반


                                                검샐 / 구글 / 검색 / 스데반 수도원 벽화


(사도행전7장 51~60절)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아 너희가 항상 성령을 거슬러 너희 조상과 같이 너희도 하는 도다.
너희 조상들은 선지자 중에 누구를 핍박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저희가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 너희가 천사의 전한 율법을 받고도 지키지 아니하였다 하니라.
저희가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저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 한 대, 저희가 큰 소리를 지르며 귀를 막고 일심으로 그에게 달려들어 성 밖에 내치고 돌로 칠 새 증인들이 옷을 벗어 사울이라 하는 청년의 발 앞에 두니라.
저희가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가로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가로되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스데반 이야기는 사도행전 6장과 7장에 있다.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스데반이 역사적 진실을 말하니까 사제들이 마음에 찔려 미워하다가, ‘당신들이 오시리라 예고된 의인을 잡아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된다.’고 말한 다음, 하늘을 보면서 하나님의 영광과 예수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본다고 말했다.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사람들은 큰소리를 지르면서 돌을 던져 스데반을 죽였다.
스데반은 위풍당당하게 죽었다.
그래서 천주교에서는 스데반을 최초의 순교자로, 성인의 반열에 올렸다.
그러나 예전부터, ‘수전절의 역사적 의미’에 문제가 있다면서 말썽을 피운 무리가 있다고 한다면, 스데반은 기독교의 순교자가 아니다.
 
스데반은 수난의 유대 역사를 이야기했다. 요단강에서 침례를 행하던 요한도 수난의 유대 역사를 말했다.
사두개인들과 바리새인들을 싸잡아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 하더냐?’ 이렇게 말하곤 했었다.
요한은 말끝마다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고 생각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진다.’고 말했다.
그러니까 갑자기 나타난 스데반은 침례요한의 제자였거나, 광야의 수도원 엣세네파에 속한 사람이었다고 봐야 한다.
 
베드로를 비롯하여 예수의 제자들이 예루살렘에 다시 와서 베다니 사람들 환대를 받았다. 그리고 바리새인들의 암묵적인 보호를 받으면서 맥추절(오순절)에 예루살렘 시내에서 발대식(?)을 가졌다.
그리고 예수 부활에 대해서 이야기 하다가 대제사장 가야바로부터 훈계를 받았고, 그 후, 감옥에 갇혔다가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을 때 바리새파의 최고 지도자 가말리엘이 비호하는 발언을 했다.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둡시다. 이들의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고, 만일 하나님으로 났으면 당신들이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됩니다.”
검사와 변호사의 변론으로 죄를 따지는 로마법정과는 달리, 유대인들의 산헤드린 법정은 배심원 제도였다.
배심원들은 가말리엘의 말을 듣고 무죄를 선고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배심원의 판결을 무시할 수 없었다.
그러나 심기가 불편한 가야바는 죄인들을 방면하면서 가말리엘에게 한 소리 했다.
“당신 오늘, 큰 실수를 한 겁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발생하는지 두고 봅시다.”
물론 이렇게 말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러나 유대광야의 수도원 최고지도자 ‘의의교사’는 성전 무용론을 주장했다.
엣세네파 사람들은 시리아의 유대교 탄압으로 쫓김을 당한 전직 사제들과 레위 출신 후손들이었다. 그들은 수전절 행사를 방해하거나 줄기차게 비난했다.
그들은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면서 ‘돌이 돌 위에 하나도 남지 않고 다 무너진다.’고 말했다. 그들은 자신들의 존재감을 드러내려고 기회를 엿보고 있다가 갈릴리 사람들 틈새에 끼어들어 얼마든지 말썽을 일으킬 수 있었다.

 


출애굽 사건과 관련이 있는 유월절과는 달리, 수전절 역사는 오래 되지 않았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루시아를 무너뜨리고 동방정벌에 나섰다가 죽고, 그의 참모였던 셀레우코스1세는 시리아에 왕조를 세웠다(BC311).
프톨레마이오스1세는 이집트에 왕조를 세웠다(BC305).
그 후, 유대는 시리아 속주가 되면서 대제사장과 사제들은 시리아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기득권을 행사했다.
로마가 지중해의 패권국으로 급부상하면서 로마와 싸우던 카르타고의 한니발이 도망을 다니다가 시리아 왕 안티오코스3세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리아 왕이 한니발을 도와주려고 로마와 싸우다가 기원전196년에 패했다. 한니발은 소아시아의 비티니아로 도망가서 자살했다(BC192)
한니발에게 협조했던 안티오코스3세는 로마에 충성을 맹세했고, 로마는 시리아를 적으로 여기지 않았다. 전쟁 배상금도 요구하지 않고, 선린 왕국으로 대접했다.
로마는 한니발을 뒤쫓아 가서, 마케도니아와 전쟁 중에 있었다.
부친이 죽고, 시리아 왕이 된 안티오쿠스4세가 이집트를 침략하려고 군대를 예루살렘에 집결시켰다.
이때, 대제사장 승계 문제로 불만이 많았던 누군가가 마케도니아의 로마군에 가서 고자질을 했다.
포필리우스 라에나스가 달려와서, 이집트 침략을 중단하라고 말했다(BC165).
안티오쿠스4세는 생각할 시간을 달라면서 능청을 떨었다. 라에나스는 막대기로 둘레에 원을 그려 놓고, 이 선을 벗어나기 전에 결정하라고 압박했다.
안티오쿠스4세는 이집트 침략을 포기하고 시리아로 돌아가면서, 괘씸죄로 대제사장을 잡아갔다. 그리고 유대교 행사를 못하게 했다(BC165).
이것이 소위 유대인들이 말하는 시리아의 종교 탄압이었다.
이렇게 되니까 성전의 실세였던 사제들과 레위인들은 쫓김을 당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 대신, 예루살렘 성전을 그리스 계열의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이 차지했다.
바빌로니아 디아스포라 유대인들도 예루살렘 시가지를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사두개파와 바리새파가 생겨났다.
 
시리아 왕 안티오쿠스4세가 죽고, 아홉 살이었던 안티오쿠스5세가 왕위를 물러 받았다. 어린 왕의 섭정으로 삼촌 리시아스가 권력을 장악했다. 그런데 섭정 2년이 되던 해(BC162) 어린 왕이 죽었다. 왕이 죽으니까 리시아스는 정적들의 도전을 받으면서 시리아는 파국을 향해서 치닫고 있었다.
시리아와 가까운 모데인에서 살고 있던 전직 사제 출신 마타디아와 다섯 아들이 뻔질나게 시리아를 드나들면서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하면서 충성을 맹세하고, 유대 왕 칭호를 받아가지고 왔다.
시리아는 파국 직전이라서 유대에 신경을 쓰지 못했다. 마타디아와 다섯 아들이 시리아와 싸워서 독립을 쟁취한 것처럼 위세를 떨면서 예루살렘을 장악했다.
이것이 하스모니아 왕조(BC164~BC63)의 시작이었다. 왕권을 행사하게 된 하스모니아 사람들은 기존의 사두개파 사제들과 손을 잡고 성전 정화사업을 벌렸다.
그런 다음 8일간 성전과 각 가정에서 촛불을 밝히게 하면서 수전절 봉축행사를 했다.
그렇게 되니까 시리아의 유대교 탄압 당시, 쫓김을 당한 엣세네파 사람들은 유대광야에 수도원을 짓고, 줄기차게 수전절 행사 때마다 시비를 걸면서 성전 무용론을 주장했다.
그러므로 스데반은 예수 부활과 무관한 사람이었다.
사도행전을 쓴 작가가 관련이 있는 것처럼 만들어 놓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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