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가말리엘의 정치적 꼼수

   
                                                     출처 / 구글 / 여브스와 다윗성



(사도행전5장 27~41절)
저희를 끌어다가 공회 앞에 세우니 대제사장이 물어 가로되 우리가 이 이름으로 사람을 가르치지 말라고 엄금하였으되 너희가 너희 교를 예루살렘에 가득하게 하니 이 사람의 피를 우리에게로 돌리고자 함이로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 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신 성령도 그러하니라 하더라.
저희가 듣고 크게 노하여 사도들을 없이하고자 할 새, 바리새인 가말리엘은 교법사로 모든 백성에게 존경을 받는 자라 공회 중에 일어나 명하사 사도들을 잠간 밖에 나가게 하고 말하되, 이스라엘 사람들아 너희가 이 사람들에게 대하여 어떻게 하려는 것을 조심하라.
이전에 드다가 일어나 스스로 자랑하매 사람이 약 사백이나 따르더니 그가 죽임을 당하매 좇던 사람이 다 흩어져 없어졌고, 그 후 호적할 때에 갈릴리 유다가 일어나 백성을 꾀어 좇게 하다가 그도 망한즉 좇던 사람이 다 흩어졌느니라.
이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사람들을 상관 말고 버려두라.
이 사상과 소행이 사람에게서 났으면 무너질 것이요, 만일 하나님으로 났으면 너희가 저희를 무너뜨릴 수 없겠고 도리어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가 될까 하노라 하니, 저희가 옳게 여겨 사도들을 불러들여 채찍질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는 것을 금하고 놓으니, 사도들은 그 이름을 위하여 능욕 받는 일에 합당한 자로 여기심을 기뻐하면서 공회 앞을 떠났니라.
 
갈릴리 사람들이 오순절(맥추절) 이후, 예루살렘에 거주하면서 조직적으로 선교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역사에 전무후무한 대사건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모임을 갖고 얼마 후, 베드로를 비롯하여 갈릴리 사람들이 모두 구속당하고 산헤드린에서 재판을 받게 되었다.
그 이야기를 하기에 앞서 왜, 갈릴리 사람들이 예루살렘에서 활동할 수 없었는지 역사적 배경부터 종합적으로 살펴봐야 한다.
 
마태복음1장에 보면 예수의 족보에 대한 기록이 있다.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 이렇게 시작하면서
①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
②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이거할 때까지 열네 대,
③바벨론으로 이거한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로 명시되어 있다.(1~17절)
왜, 족보를 세 부분으로 나누었을까?
 
① -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는 출애굽 이후 시나이반도에서 유량생활을 하던 시절이었다. 족보상 문제될 것이 없었다.
애급에서 쫓김을 당한 유대인들은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시나이반도에서 유랑생활을 하다가 아브라함이 가나안으로 이주해서 최초로 장막을 쳤던 헤브론을 갔다.
유대인들이 도착하니까 인근 부족들이 가만있지 않았다. 특히 블레셋 사람들은 무력을 써가면서 쫓아내려고 했다. 그들과 여러 차례 싸워도 보았지만 이길 승산이 없었다.
그래서 다윗이 여브스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가 경계가 느슨한 야밤에 기습공격을 하고, 여브스(예루살렘)를 빼앗았다.
 
② - 여브스는 고지대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었다. 기드론 골짜기, 디로페온 계곡, 힌놈 골짜기로 이루어진 천혜의 요새였다.
하지만 골짜기 사이의 좁은 토지만 가지고는 먹고 살 길이 막막했다. 다윗이 궁여지책으로 생각해 낸 것이 성전 사업이었다.
웅장한 성전을 짓고 순례자들을 불러 모우면 그들이 가지고 온 돈으로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윗은 오벨 산 중턱에 자신이 거처할 궁궐부터 짓고, ‘나는 백향목 궁궐에 거하거늘 법궤는 휘장 가운데 있도다.’ 하면서, 사람을 기브온 산당으로 보내 그곳의 법궤와 휘장을 가지고 오면, 성전을 짓겠다는 말을 했다.
기브온은 예루살렘에서 직선거리로 약 8km 떨어진 곳이다. 그곳 제사장 사독과 다른 제사장들은 다윗이 여브스를 공격할 때 동참하지 않았고 다윗에게 법궤와 휘장을 줄 리 만무했다.
그런데다가 ‘다윗은 여브스를 빼앗기 위하여 무고한 사람의 피를 많이 흘렸고, 참모의 아내를 빼앗기 위하여 적진 깊숙이 들어가서는 참모를 홀로 남겨 두고 도망쳐 죽게 한 파렴치한 인간.’이라면서 성전을 지을 자격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다윗은 성전 사업을 포기하지 않고, 죽기 직전 아들 솔로몬에게 말했다.
“내가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 재목과 돌을 예비하였으나, 너는 더 보탤 것이며, 또 공장이 네게 많이 있으니 곧 석수와 목수와 온갖 일에 익숙한 사람이니라. … 너는 반드시 내가 못 다한 일을 이루어야 하느니라.”
다윗이 죽고 7년이 되던 해(BC 959), 성전이 완성되었다.
솔로몬은 다시 사람을 기브온 산당으로 보냈다.
그곳 제사장들은 ‘다윗의 예배당’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오지 않았다.
그렇게 되니까 애급 사람들이 와서, 부정한 산당과 아세라 목상과 새긴 우상과 부어 만든 우상, 그리고 바알의 제단으로 쓰이게 되었다.
생존 수단으로 만들어진 성전이기 때문에, 바알의 제단으로 사용해도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러다가 성전 사업이 번성하니까, 히스기아(BC728)와 요시아 왕이 종교 개혁을 빌미로 바알의 제단을 부셔버렸다(BC 622).
가만히 보고 있을 애급 사람들이 아니었다. 솔로몬 성전은 373년 동안 명맥을 이어왔지만 극히 짧은 기간만 유대 성전으로 쓰였을 뿐이었다.
이처럼 바빌로니아와 애급 틈새에 끼어 말썽을 피우니까, 느브갓네살 왕이 달려와서 성전에 불을 질러 없애버리고, 다윗의 후손들을 바빌로니아로 데리고 갔다.(BC586)
 
                                         출처 / 네이버 / 스룹바벨
 

③ - 느브갓네살 왕 사망 이후, 국운이 다한 바빌로니아는 신생 페루시아로 국명이 바뀌었다.
페루시아는 국력이 크게 신장하면서, 애급을 침략하려고 예루살렘을 전초기지로 삼았다.
이 때, 다윗의 16대 후손을 자처하던 스룹바벨이 동족 372명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다. 49년만의 귀환이었다.(BC 537)
귀국한 다음 해, 성전을 지으려고 하니까 예루살렘에 남아 있던 기브온 산당의 후예들과 멜기세덱 반차를 거론하던 무리가 반대하면서 공사는 시작도 하지 못했다.
15년이 지난해부터 어렵사리 시작해서, 4년이 되던 해에 완성했다.(BC 516)
페루시아는 애급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현지에 왕조를 세웠다(BC 525), 그리고 여세를 몰아 소아시아와 인근의 여러 도시도 점령했다.
어렵사리 성전을 지었지만 다윗에 대한 인식이 나빴기 때문에 스룹바벨은 왕이나 제사장으로 인정을 받지 못했다.
스룹바벨은 사마리아로 가서 그리심 산에 또 다른 성전을 세웠다.
그리심 산 성전도 오래가지 못했다.
하스모니아 왕조(BC142~BC63)가 예루살렘을 차지했을 때, 히루카누스가 무뢰배들을 보내 불을 질러 성전을 없애버렸다.
그렇게 되니까 다윗의 후손들은 갈릴리 지역으로 가서, 예루살렘을 되찾을 기회를 노렸기 때문에 갈릴리는 반역의 땅으로 불리게 되었다.
 
지중해의 패권을 거머쥐게 된 로마는 파르티아를 정복하려고 몇 차례 공격을 시도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파르티아는 바빌로니아와 페루시아 후예답게 강했고,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폼페이우스는 북쪽의 아르메니아 고원지대에서 발원하여 시리아 사막을 횡단하고, 메소포타미아 평야를 가로질러 페르시아 만에 이르는 유프라테스 강을 국경선으로 하자고 먼저 제안을 하고, 불가침 조약을 맺었다(BC66).
국경선을 확정지은 폼페이우스는 왕권 다툼으로 말썽을 피우는 시리아의 셀레우코스 왕조를 기원전65년에 없애버렸다. 그때부터 시리아는 로마의 속주가 되었다.
그러나 유대의 하스모니아 왕조는 내버려두었다. 이처럼 선린 왕국으로 대접을 해 주었는데도 늙은 왕이 죽으니까, 왕자 사이에 왕권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순방길에 나섰던 폼페이우스가 이 사실을 알고, 형제를 불러 화목하게 지내라고 좋게 타일렀다. 그런데도 동생(아리스토블로)이 갈릴리에서 다윗 왕 후손을 자청하면서 말썽을 피우던 에제키아를 끌어들여, 모친과 형(히루카누스)를 옥에 가두고 왕 행세를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폼페이우스는 하스모니아 왕조를 없애버렸다. 그리고 이두메 지역의 행정장관이었던 안티파테르에게 유대 전 지역을 맡겼다(BC63).
기원전48년 폼페이우스가 죽고, 4년 후 카이사르도 암살당했다.
암살에 가담했던 마케도니아 총독 브루투스와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가 반역을 모의할 때, 시리아 총독 카시우스에게 협조하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을 차지하고는 이두메의 안티파테르를 독살했다(BC43).
외지에 나가 있던 헤롯이 부친의 사망 소식을 듣고,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마크 안토니로부터 유대 왕 칭호와 3천의 용병을 가져도 된다는 허락을 받았다(BC40).
 
용병을 가지게 된 헤롯은 갈릴리의 세포리에서 드라키아족 가을족 튜론족으로 편성된 3천의 용병을 모집하고, 그동안 다윗 왕 후손을 자처하던 에제키아를 죽였다.
이와 같은 역사적 사실을 유대인들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하여 갈릴리 사람들을 다시 예루살렘으로 오게 해서 <오순절 성령강림>과 같은 사건을 일으키도록 분위기를 조성한 가말리엘이었다.
그래 놓고서는 대제사장 가야바가 베드로와 갈릴리 사람들을 구속하니까, 재판을 받는 자리에서 에제키아의 아들 갈릴리 유다와 그의 형제 드다를 거론하면서 대제사장 가야바를 어리둥절하게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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