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최후의 만찬> 각본으로 스타가 된 바울

            출처 / 구글/ 최후의 만찬 검색/ 가롯인 유대가 중앙 전면에 있다.

(고린도전서11장23~29절)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하지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에 대하여 죄를 짓는 것이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별하지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고린도전서는 서기55~56년 바울이 썼다. 예수사건 당시 20세였다고 추정되는 바울은 길리기아의 다소에서 태어난 유대인이었다.
일찍이 그리스 문화의 교육을 받고 로마시민권을 가졌으며 예루살렘에 와서는 바리새파 최고지도자 가말리엘 문하에서 학업을 이수했다. 그의 이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은 ‘스데반 사건’ 때부터였다.
스데반이 대제사장 앞에서,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장황하게 이야기 하다가 성난 백성들이 던지는 돌에 맞아 죽었다. 그 때 돌을 던지던 사람들이 스데반과 동행했던 바울(사울)에게 자신들의 옷을 벗어 던지면서 두고 보자는 식 감정 표현을 했다.
스데반 사건 이후, ‘부활한 그리스도’ 척결을 하려고 ‘40인의 랍비 특공대’가 조직되었다.
바울이 바리새인들의 신뢰를 회복하려는 생각에서 적극적인 행동을 보였다.
시리아로 도망간 이단자들을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오겠다면서 랍비 특공대의 일원으로 시리아에 갔다가 다메섹 도상에서 신비로운 그리스도 출현을 경험했다.
3일간 실명 상태에 있으면서 되레 소명감을 느끼고, ‘부활한 그리스도’ 사도가 되었다는 자전적 이야기가 사도행전9장(1~30)에 있다.

다메섹 도상에서 종교적 체험을 한 후, 잠시 북 아라비아에 갔다가 다시 다메섹으로 돌아와서 ‘부활한 그리스도’ 지도자로 활동을 시작했다.
3년 뒤 베드로와 야고보를 만나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시리아와 길리기아 지역에서 활동을 했다.
직업이 어부였던 베드로와 달리, 학문을 연마한 바울은 역동적 신앙을 개진했고, 외적인 율법의 요구보다는 내적 기질의 변화와 사랑의 실현을 강조했다. 이로 인하여 기존 세력과 대립하게 되었다.
14년 동안 ‘부활한 그리스도’에 대해서 연구하고 예루살렘에 와서는 이방인들을 위한 사도로서의 입지가 확고해졌다면서 전도를 승인받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주권에 대한 설명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독보적 해석을 전개했다.

바울은 자신의 신학적 깨달음을 바탕으로 예수의 말과 행위를 이야기 형식으로 썼다.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 사 축사하시고 떼어 이르시되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그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이르시되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그가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이처럼 예수가 다락방에서 <최후의 만찬>을 주재했다는 내용의 각본을 만들었다.
서기30년, 유월절 예비일이 시작되는 저녁, 베다니 사람들을 따라 어느 다락방에 간 예수는 불법을 행하는 자들의 모임에 속아서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급히 감람산으로 피신했다.
그런데도 바울은 예수가 불법을 행하는 주도적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바울은 다락방에 가지도 않았다.
그런데도 작가적 상상력을 발휘하면서 드라마적 감동과 재미를 결합한 각본을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바울이 그리스도교 신학에 끼친 업적 중에서 <최후의 만찬>은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출처 / 네이버 / 발을 씻기는 예수 이미지 검색 


서기65~70년에 나온 마가복음의 저자가 바울의 <최후의 만찬>을 차용했다.
‘그들이 먹을 때에 예수께서 떡을 가지사 축복하시고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내 몸이니라 하시고 또 잔을 가지사 감사 기도하시고 그들에게 주시며 이르시되 이것은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흘리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 …’ (14;22~26)

그러나 80~90년에 나온 요한복음에는 떡과 포도주 이야기가 나오지 않는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제자들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 … (13;1~11)

서기85~90년에 나온 마태복음(26;26~30)과 누가복음에도 <최후의 만찬>이 있다.
‘때가 이르매 예수께서 사도들과 함께 않으사 이르시되 내가 고난을 받기 전에 너희와 함께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유월절이 하나님의 나라에 이르기까지 다시 먹지 아니하시리라 하시고 이에 잔을 받으사 감사기도 하시고 이르시되 이것을 갔다가 너희끼리 나누라 … (누가복음22;14~20)

이처럼 선정적이면서 자극적인 <최후의 만찬> 이야기를 중세 가톨릭교회는 화가들로 하여금 명화로 그리게 했다.
그 바람에 ‘태생적 창조 정신과 자력갱생의 정신력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 나사렛 예수는 천박한 지성을 말한 사람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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