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선행을 가장한 니고데모의 비열한 음모



(요한복음19장 38~42)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의 제자나 유대인을 두려워하여 은휘하더니 이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 가니라.
일찍 예수께 밤에 나아왔던 니고데모도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 근쯤 가지고 온지라 이에 예수의 시체를 가져다가 유대인의 장례법대로 그 향품과 함께 세마포로 쌌더라.
예수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에 동산이 있고, 동산 안에 아직 사람을 장사한 일이 없는 새 무덤이 있는지라, 이 날은 유대인의 예비일이요 또 무덤이 가까운 고로 예수를 거기 두니라.

유대인들은 지상낙원에 대한 소망을 이어가는 사람들이었다. 아무리 고단한 삶을 살더라도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자살 행위를 죄악으로 여기는 사람들이다.
영혼 따위로 위안을 받으려고 하지 않았다. 죽어서 간다는 사후 세계를 인정하지 않았다.
오직 현세가 중요하다고 여기면서 생명에 대한 특별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유대인들은 사람이 죽으면 빨리 흙으로 돌아가게 하려고, 갈대로 엮은 들것 위에 시신을 놓고 땅에 묻는 장례법을 고집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신을 가지고 가서, 동굴무덤에 넣었다.
괴상망측하면서도 참으로 수상쩍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무슨 꿍꿍이속이 있는 게 분명하다.
그들의 꿍꿍이속을 낱낱이 파헤치고 진실을 밝혀야 한다.

예수 생존 당시에도 동굴무덤에 시신을 넣고 이제나 저재나 죽은 자가 살아나기를 기다리던 어리석은 자들이 있었다.
‘어떤 병든 자가 있으니 이는 마리아와 그 형제 마르다의 사촌이며 베다니에 사는 나사로라 … 예수께서 와서 보시니, 나사로가 무덤에 있은 지 이미 나흘이라,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매 … 예수께서 큰 소리로 나사로야 나오라 부르시니, 죽은 자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로 나오는데 그 얼굴은 수건에 싸였더라. 예수께서 가라사대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 하시니라. 마리아에게 와서 예수의 하신 일을 본 많은 유대인이 저를 믿었으나 그 중에 어떤 자는 바리새인들에게 가서 예수의 하신 일을 고하니라.’ (요한복음11;1~46)

예수가 죽은 나사로를 살렸다는 이야기는 요한복음에만 있다.
누가복음에도 거지 나사로 이야기가 나올 뿐이다. 그 이야기는 요한복음의 나사로와 관련이 없다.
팔레스타인 지역 어디에도 동굴무덤에 시신을 넣고, 죽은 자가 살아나기를 기다렸다는 기록이나 전설은 없다.
예루살렘에서 가깝기가 한 오 리쯤 되는 베다니 사람들이 유일했다.
그들은 요단강 나루터 건너편에서 활동하던 침례요한의 제자들이었다.
누가복음23장에 보면, 그들이 시신을 동굴무덤에 넣고 부활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바리새인들에게 알린 자가 있었다.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예수의 시신을 매장할 것처럼 총독을 속이고 동굴무덤에 넣었다.
이때, ‘갈릴리에서 예수와 함께 온 여자들이 좇아가서 무덤의 위치와 시체를 어떻게 두었는지 보고 갔다.’(55절)

바리새파 랍비들은 성전의 사제들이 주관하는 유월절 축제 행사에 동참할 수 없었다.
그래서 ‘공부하는 것이 사실상 예배(제사)하는 방법이다. 배우는 일에 게을리 하지 말라.’ 고 말하면서 학습을 권장하고 자선과 구제를 최고의 미덕이라고 가르쳤다.
바리새파 최고 지도자 힐렐(BC70~BC10)은, 많은 자선이 평화를 가져온다고 말했다.
그 후, ‘겉옷을 달라는 자에게 속옷까지 벗어주라.’
‘네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있으리라.’
이렇게 말하는 자들이 생겨났다.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할 수 없듯이 부자는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
이와 같은 우스꽝스러우면서도 언어적 유희에 해당하는 말들이 시중에 나돌았고, 재산을 몽땅 자선사업에 쓰고 알거지가 된 자들도 생겨났다.
그렇게 되니까, 힐렐이 자기 재산의 1/5 이상은 자선에 쓰지 말라고 말을 바꾸었다.
바리새파 랍비들이 가르치는 교훈은 모두가 이런 식이었다.

보잘 것 없는 겨자씨 한 알에도 생존에 필요한 유전 정보를 갖고 있다는 식의 비유를 예수가 말했다.
겨자씨가 그러하거늘, 사람에게도 태생적 창조 정신과 자력갱생의 정신력이 있다면서, 그 정신력이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이 산을 저리로 옮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처럼 예수의 가르침은, 힐렐의 가르침과 천양지차가 있다.
니고데모가 예수를 따라다니면서 말꼬투리를 잡으려고 괜한 질문을 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은 랍비들은 예수를 미워했다.
아리마대 요셉과 니고데모가 어리석은 여인들이 보는 가운데, 예수의 시신을 동굴무덤에 넣은 말 못할 사정은, 상처 받은 자신들의 자존심 때문이었다.
이것을 가지고 일각에서는 영원히 풀리지 않을 미스터리라고 둘러댄다. 
이것이 어떻게 미스터리란 말인가? 
예수를 허망지설 중심에 들게 하고, 예수의 가르침을 흔적조차 남지 않게 없애버리려는 비열한 음모였던 것이다.

댓글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2, 침례요한과 안티바 그리고 예수

21, 헤롯왕과 예수 탄생 관련 기사는 역사의 날조

22, 헤롯의 유아살해는 새빨간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