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요한의 제자와 예수의 불편한 관계



(마태복음 13장 1~48절)
그 날에 예수께서 집에서 나가사 바닷가에 앉으시매 큰 무리가 그에게로 모여 들거늘 예수께서 배에 올라가 앉으시고 온 무리는 해변에 섰더니 예수께서 비유로 여러 가지를 저희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 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서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의 결실을 하였느니라. 귀 있는 자는 들으라 하시니라.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가로되 어찌하여 저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나이까?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
또 비유를 베풀어 가라사대 천국은 마치 사람이 자기 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이는 모든 씨보다 작은 것이로되 자란 후에는 나물보다 커서 나무가 되매 공중의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이느니라.
또 비유로 말씀하시되 천국은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다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예수께서 이 모든 것을 무리에게 비유로 말씀하시고 비유가 아니면 아무 것도 말씀하지 아니하셨으니 …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좋은 진주를 구하는 장사와 같으니 극히 값진 진주 하나를 만나매 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진주를 샀느니라.
또 천국은 마치 바다에 치고 각종 물고기를 모는 그물과 같으니 그물에 가득하매 물 가로 끌어내고 앉아서 좋은 것은 그릇에 담고 못된 것은 내어 버리느니라.

신약성경 목차는 마태복음 마가복음 누가복음 요한복음 사도행전, 로마서 … 순이다. 그런데 학자 간의 논쟁으로 밝혀진 바에 의하면, 복음서 제작 년도와 목차는 천양지차가 있다.
 
신화적으로 죽었다가 부활한 예수를 믿는 것만으로도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 바울의 여러 서간문은 50~67년에 나왔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헛것이라면서 바울의 주장에 반박을 가한 야고보는 62~64년에 나왔다.
바울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예수의 신화’에 역사적 지리적 배경을 첨가한 마가복음은 65~70년에 나왔다.
그 후, 예수의 탄생설화와 부활에 대한 세부 내용이 윤문 된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85~90년에 나왔다. 
요한계시록은 95년 경, 요한복음은 120년경, 사도행전은 150~177년에 나왔을 것으로 추정한다.
이처럼 제작 연도가 다른 복음서들을 먼저 나온 순서대로 다시 배열하면 <바울의 여러 서간문>, <야고보서>, <마가복음>, <마태복음>, <누가복음>, <요한계시록>, <요한복음>, <사도행전> 순이 된다.
그런데도 기독교계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상에서 죽은 서기 30년부터 유대가 파국을 맞은 70년까지를 잃어버린 40년이라면서 거론조차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 40년 동안, 유대의 종파분자들은 우호적이었던 로마 총독들을 괴롭혔을 뿐만 아니라 온갖 허망지설을 유포하면서 파국을 자초했다.
(바이블해커1권1장, 바울과 무함마드 그리고 유사 교주들 중에서)

그리스도교 신학의 토대가 된 요한복음1장 25~38절을 보면, 예수와 침례요한의 관계가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바리새인들이 보낸 자가 또 물어 가로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도 아니요 엘리야도 아니요 선지자도 아닐진대 어찌하여 침례를 주느냐?
요한이 대답하되 나는 물로 침례를 주거니와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있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들메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하더라.
이 일은 요한의 침례 주던 곳 요단 강 건너편 베다니에서 된 일이니라.
이튿날 요한이 예수께서 자기에게 나아오심을 보고 가로되,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는 사람이 있는데 나보다 앞선 것은, 그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내가 와서 물로 침례를 주는 것은, 그를 이스라엘에게 나타내려 함이라 하니라.
요한이 또 증거 하여 가로되, 내가 보매 성령이 비둘기같이 하늘로서 내려와서 그의 위에 머물렀더라.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침례를 주라 하신 그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 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침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 하였다하니라.
또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중 두 사람과 함께 섰다가 예수의 걸어 다니심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
두 제자가 그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거늘, 예수께서 돌이켜 그 좇는 것을 보시고 물어 가라사대 무엇을 구하느냐?
여기서 ‘무엇을 구하느냐?’ 라고 묻는 말의 뉘앙스는 참으로 의미심장하다. 따라오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들메끈을 풀기도 감당치 못하겠노라’ 라고 한 말도 겸손을 가장하면서 침례요한이 자기가 실세임을 알리는 대목이라고 볼 수 있다.
사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럴 가능성이 매우 높다.
침례요한은 서기28년 안티바에게 죽임을 당했다. 
그러니까 예수는 요한이 죽기 전에 요단강 나루터 건너편 베다니로 갔다가 갈릴리로 돌아와서는 침례요한과의 관계를 끊으려고 했다. 그런데도 요한의 제자였던 안드레와 빌립과 세베대의 아들 요한이 따라와서 열두 제자 그룹을 만들었다.
안드레는 자신의 친형인 시몬(베드로)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메시아를 만났다 말했고, 빌립도 나다나엘을 찾아가서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가 알고 보니, 요셉의 아들 나사렛 예수였다’고 말했다.
그러자 나다나엘(바돌로매)이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하였고, 빌립은 ‘그럼 와서 한 번 봐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예수의 존재를 고향 사람들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조금 늦게 도착한 세베대의 아들 요한도 그의 형제 야고보를 끌어들였다.
이렇게 여섯 사람이 주축이 되어, 세리였던 마태를 비롯하여 젤롯 당원이었던 가나안인 시몬,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작은 야고보와 그의 형제 다대오(유다)와 마지막으로 가롯인 유다를 무리에 포함시켰다.
그런데도 성경에는, 예수가 제자들을 선택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마태복음8장 19~20절은 그것이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한 서기관이 나아와 예수께 말하되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좇으리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우도 굴이 있고 공중의 새도 거처가 있으되 오직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하시더라.”
이처럼 예수는 제자가 생기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런데도 제자 하나가 부친의 장사를 지내려 간다니까, ‘죽은 자들로 저희 죽은 자를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말했다’고 되어 있다.
부친의 장례조차 지내지 못하게 붙잡을 정도로 비정한 사람은 예수가 아니고, 침례요한이었다. 요한은 원색적인 비난과 위협적인 발언으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예수와 3인의 카이사르 9장, 요한의 제자들 중에서)



슈바이처는 1778-1901년 사이에 출판된 600여권의 예수 생애에 관한 책들을 종합 분석하고는 『예수의 생애 연구사』를 1906년에 발표했다.
그 후,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복음서 저자들이 자신들이 갖고 있던 생각과 시대 배경을 예수에 투사했다면서, 이상적인 이미지일 뿐 예수에게는 참된 가르침이 없다.”고 말했다.
수가 누구인지 밝혀내려는 노력은 인종과 시대를 불문하고 이어져 왔다고 볼 수 있다.
필자도 그 중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예수의 생애 연구사』를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한 가닥의 기대마저 사라지고 말았다. 
바이처는 '역사적 예수' 연구가 학문적으로 무리였음을 알고는 의학을 공부하고, 아프리카에 가서 의료봉사를 하다가 90세에 사망했다.
그런데 신약성경을 문헌학적 또는 비판적 안목으로 보면, 살아생전의 예수도 자신의 가르침이 시기상조임을 알고, 철저하게 대비한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사복음서 중에서도 특히 마태복음의 ‘산상수훈’에는 <천국 복음>, <천국의 비밀>, <천국의 열쇠>라는 비유로 된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마태복음 3장에 보면,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다’면서 침례요한이 천국을 처음 말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적개심을 자극하는 불순한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예수가 자신의 메시지를 천국에 숨겨 놓기 시작하면서, 천국은 사람들의 상상력과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매력적인 단어로 바뀌었다.
그러므로 예수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고 싶으면, 비유에 능한 작가의 관점에서 성경을 읽어야 한다. 
그러면 예수의 진짜 메시지를 찾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허망지설을 유포하면서 유대를 서기70년 파국으로 몰고 갔던 망상에 사로잡힌 종파분자들 모습도 함께 발견할 수 있다.
(바이블해커2권, 서문 중에서)

마태복음13장에 있는 ‘천국의 비밀을 아는 것이 너희에게는 허락되었으나 저희에게는 아니 되었나니’ 하는 구절은, 요한의 제자들을 경계하던 예수의 역설적 표현이었다고 봐야 한다.
무엇이든지 올바르게 비판하고 인식할 줄 아는 사람만이 비유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단강 하구의 나루터 건너편 베다니에 있다가 침례요한이 죽으니까 바리새인들처럼 예루살렘 시내에 거점을 마련하려고 감람산 근처의 작은 베다니까지 진출해 있었다.
갈릴리에서 명성을 날리던 예수가 오니까, 예수를 전면에 내세우고 자신들의 존재감을 과시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기 위한 기회를 만들려고 했다.
그들이 노린 것은 단지 그것뿐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태생적 창조 정신과 자력갱생의 정신력으로 새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한 예수의 가르침에 대해서는 관심조차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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